야당 대표도 게이트 관련자도 '표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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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관계자는 "김씨 공소장에는 적시하지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회 각계 인사의 통화가 도청됐다"고 말했다.

◆ 한나라당 도청 가능성=김씨 공소장에는 범죄 혐의 중 공소시효가 남아 있는 불법 도청 사례 7건이 기재됐다.

공소장에 따르면 국정원은 당시 집권당인 민주당 외에도 민국당.자민련 등 야당 의원들을 도청했다. 2001년 4월 중순 민주당 김중권 대표와 자민련 김종호 총재권한대행, 민국당 김윤환 대표는 3당 정책연합 출범을 대국민선언 형식으로 공식발표했다. 국정원은 당시 정책 연합과 관련한 김윤환 대표와 민주당 모 의원 간 통화내용을 도청했다.

자민련의 경우 2001년 9월 초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을 놓고 여야가 대치하고 있을 때 이완구 원내총무와 자민련 관계자 사이의 통화가 도청당했다. 당시는 친북인사들의 8.15 평양축전 방북 허용 문제로 국회 표결에서 임 장관의 해임안이 가결되는 등 긴박한 상황이었다. 국정원은 임 장관 해임에 대한 자민련의 입장을 알기 위해 도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청와대 및 여권과 대립 관계의 중심 축에 있는 한나라당을 도청한 사례는 한 건도 공개되지 않았다. 김씨가 직원들에게 고급 정보를 수집하라고 독려했던 정황에 비춰볼 때 국정원이 한나라당은 도청하지 않고 민주당과 대통령 친인척의 측근들만 도청했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검찰이 수사 중간 단계에서 불거질 수 있는 불필요한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한나라당에 대한 도청내용 공개를 미루고 있을 수도 있다. 검찰 관계자는 "지금 단계에서는 기소해도 충분한 사안들만 공소 사실에 포함시켰다. 추가기소할 수 있다"고 밝혀 한나라당 관계자들을 도청한 정황이 있음을 내비쳤다.

◆ 24시간 도청=국정원이 유선통신망 휴대전화 감청장비(R-2) 6세트 개발을 완료한 것은 1999년 9월. 곧바로 서울 시내 광화문전화국 등 주요 전화국 여섯 곳의 유선통신망 구간에 자체 개발한 '카플러'를 연결시켰다. 카플러는 특정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면 즉시 국정원 R-2수집팀으로 통화가 연결되도록 하는 장비다.

도청을 전담한 8국(과학보안국) 국내수집과 산하 R-2수집팀은 2개 팀 8개 조 32명으로 구성됐다. 여야 정치인, 경제인, 고위 공직자 등 국내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미리 R-2에 입력해 놓고 1일 3교대로 24시간 도청했다.

검찰은 김씨의 지시를 받은 8국 직원들이 하루 60~70건 정도의 주요 인사 전화통화를 감청한 것으로 파악했다. 이 중 사안이 중요한 7~8건은 종합처리과가 대화체로 만들어 A4용지 절반 크기의 보고서 형태로 매일 상부에 보고한 사실도 확인했다. 이들 보고서는 '8국'이나 '친전'이라고 기재된 봉투에 밀봉된 채 8국장, 국내담당 차장, 국정원장에게 올라갔다고 한다. 검찰은 이 중 일부가 국내담당 차장을 거치지 않고 국정원장에게 직접 보고됐다는 진술을 확보해 놓은 상태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R-2 한 대로 최대 600회선에 접속할 수 있다. 여섯 대로는 총 3600회선에 대한 도청이 가능하다. 국정원은 8월 25일 국회 정보위에서 R-2 여섯 대로 최대 120회선만 접속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축소보고한 의혹이 일고 있다.

99년 말 개발된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 20대는 성능시험을 거쳐 이듬해 5월부터 실전 배치됐다. 초기에는 국정원 11개 지부가 1세트씩 배치받아 자체 관리하고 사용했지만 2000년 6월부터는 8국 기술연구단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했다. 기술연구단에서는 필요한 부서의 신청을 받아 CAS를 대여해 줬다.

이때 도청 대상 휴대전화 번호를 기술연구단이 직접 입력한 후 대여해 주는 경우에는 8국장의 결재를 거쳤지만, 도청 직원이 직접 현장에서 도청할 휴대전화의 번호를 입력하여 사용하는 경우에는 국내담당 차장의 결재를 받았다. 현장에서 직접 휴대전화를 입력해 사용한 경우 마구잡이식 도청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조강수.문병주 기자

임동원.신건씨 내주 소환
김은성씨와 공모한 증거 확보
이종찬.천용택씨는 시효 끝나

국정원(옛 안기부) 불법 도청사건의 수사가 전 국정원장인 임동원.신건씨 등으로 향하고 있다.

검찰은 26일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에 대한 공소장에서 임씨와 신씨가 재직 기간 중 김씨를 비롯한 국정원 8국(과학보안국) 간부들과 불법 도청을 '공모'했다고 밝혔다.

◆ "김은성씨 기소로 공소시효 정지"=이달 6일 김씨가 불법 도청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된 뒤에도 김씨의 직속상관이었던 두 사람은 "불법 도청은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검찰은 김씨와 국정원 전.현직 직원에 대한 조사에서 두 사람이 불법 도청에 관여한 정황을 상당수 포착했다. 특히 검찰은 두 사람을 김씨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하면서 압박효과를 노렸다.

검찰 관계자는 "임씨의 경우 공소시효(5년)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공범이 기소되면 시효가 멈춘다"고 말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내보인 셈이다. 임씨의 공소시효는 내년 3월로 5개월가량 남은 상태다.

수사팀 관계자는 "지금까지 확보한 공모의 결정적 증거도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8월 초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의 불법 도청 실태가 공개되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함께 김승규 국정원장을 만나 "정치적 의도가 깔린 발표"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불과 두 달여 만에 불법 도청에 개입한 혐의가 포착돼 사법처리를 눈앞에 둔 처지가 됐다.

◆ "이종찬.천용택씨는 사법처리 면할 듯"=검찰은 공소장에서 8국 국내수집과의 R-2수집팀이 도청.녹취한 자료를 녹취록 형태의 보고서로 만들어 8국장-국내담당 차장-국정원장에게 보고했다고 밝혔다. 밑에서 위로 보고라인을 밟은 게 아니라 같은 자료를 세 곳에 보고했다는 설명이다.

결국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1999년 9월 이후 재직했던 국정원장은 불법 도청을 통해 만든 자료를 받아봤다는 뜻이다.

이종찬(98년 3월~99년 5월 재직) 전 국정원장은 이 기간에서 빠지지만, 천용택(99년 5~12월 재직) 전 국정원장의 경우에는 포함된다. 검찰은 두 사람의 경우 불법 도청 관여 여부에 관계없이 통비법 공소시효가 끝나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수사 결과 발표에 따라 도덕적 비난까지 면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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