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4) 제80화 한일회담(3) 우리측 대표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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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 연재를 쓰기위해 정부가 1965년에 발간한 「한일회담백서」를 보니 만13년8개월간 7차에 걸친 회담에 참여한 우리측 대표의 연인원은 나를 포함해 68명이었다.
자연인으로는 46명이었다. 양유찬 전주미대사가 1차와 3차의 수석대표를, 김용식 전외무장관이 1차교체수석과 2차수석대표를, 내가 1차대표와 5차수석대표를 각각 맡았으며 그밖에 4차에 초반과 후반을 각각 임병직 전외무장관과 허정 전과도정부수반, 6차에 배의환 주일대사, 그리고 마지막인 7차에 당시 주일대표부 대사였던 김동저씨가 수석대표로 각각 활약했다.
특히 1차회담때 외무부 정무국장으로서 회담전문위원의 직함을 갖고 회담의 뒷바라지를 했던 김동저씨가 7차 수석대표를 맡아 한일회담을 마무리지은 것은 퍽 인상적이다.
46명인 대표들의 면면은 당시는 물론이려니와 나중에 이나라 관계와 정계를 화려하게 수놓은 거물들의 집합체였다고 하면 좀 지나친 표현일까.
우선 2명의 국가원수가 그 속에서 나왔다. 허정씨가 이승만대통령의 하야후 외무장관으로서 민주당정권이 들어설때까지 내각수반 및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고 최규하씨가 박정희대통령의 급서후 국무총리로서 대통령권한대행을 거쳐 총대에서 10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국무총리도 2명이 나왔다. 최규하씨는 박대통령 치하에서, 5차대표였던 유창순씨(현대한적십자사총재)는 제5공화국수립 이후에 각각 총리를 지냈다. 유씨는 5·16군사정부때 상공장관과 경제기획원장도 역임했다. 신성모씨와 허정씨도 50년과 51년 각각 국무총리서리를 역임했으며 허정씨는 이밖에 사회부장관과 교통부장관을 정부수립 초기에 거쳤다.
또 2차대표였던 장기영씨가 제3공화국 정부에서 경제기획원장관겸 부총리를 지냈다.
국제올림픽위원(IOC)까지 지냈던 백상 장기영씨는 l차회담이 열리기 전에 한은부총재로 회담준비에 필요했던 각종 자료를 신속하게 제공해줬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7차례의 회담을 통해 유일한 고문(제6차)으로 활약했던 국제법권위 이막기박사가 제5공화국에서 감사원장의 중책을 거쳤다. 그리고 46명의 대표들 중 17명이 장관급 의관직을 지냈다. 1차대표였던 신성모씨는 이미 당시 국방장관을 거친 거물급 인사였다. 이대통령은 신씨의 국방장관 재임중 국민방위군사전이 일어나자 주일공사로 보냈는데 그때 한일회담이 시작되자 주일공사로서 대표가 됐다
대표중에는 외무장관만도 5명이 배출됐다. 임병식 허정 김용식 최규하 김동조등 제씨들인데 김용식씨는 외무장관을 2번하고 통일원장관도 지냈다.
1·2·3차 대표였던 홍진기씨와 4차대표였던 이호씨는 모두 내무·법무장관을 거쳤으며 자유당정부와 제3공화국에서 각각 한번씩 내무·법무장관을 지낸 이호씨는 제5공화국 출범 과도기의 입법회의의장을 거쳤다.
장경근씨(2·3·4차)가 자유당시절 내무장관을, 임철호씨가 농림부장관을, 홍승환씨(6차)가 제3공화국시절 재무장관을, 이경호씨가 제3공화국에서 보사장관을 각각 지냈다.
또 장관급으로서는 1차회담 이전 초대 법제처장을 지낸 나와 자유당시절 공보처장을 지낸 갈홍기박사(1차)가 있다.
정계에서 활약한 인사로서는 임철호씨(1차)가 자유당시절의 실력자로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며 허정씨가 5·16군사혁명이후 실시된 대통령 선거전에서 「국민의당」대표 최고위원으로서 대통령후보로 추대됐으나 나중에 당 단일후보를 만들기 위해 용퇴했다.
본인 또한 60년대말 보수야당의 본류인 민중당의 대통령후보자, 통합야당인 신민당의 총재로 추대되어 박대통령의 3선개헌 기도를 막기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나는 국회의 3선개헌 표결 직전 과로로 쓰러졌고 개헌저지의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지금도 당시를 회고하면 나로서는 혼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또 회담성격상 외교관들이 많이 참여한 탓으로 김동조 최규하 김용식 정일영 진필식 윤석헌씨등 다수의 인사들이 외무차관을 거친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미·영·불·일 유엔등의 주요공관장을 많은 대표들이 맡았던 것도 물론이다.
7차의 회담중 김낙식 홍진기 장경근 최규하 유태하(전주일대사) 이상덕(한은이사·주택은행장역임) 문철순(주튀니지대사역임)씨등이 모두 3번씩 대표를 맡아 최다참여 기록자가 됐다.
또 민주당 정권때까지의 회담과 5·16군사정부때의 회담의 대표단구성을 보면 전자가 주로 외교관 법률가 금융인 수산전문가들 이었는데 비해 후자의 경우 이들외에 사학자(이홍직고대교수·작고) 고고학자(황수영 현동국대총장)들이 참여해 있는 것이 눈에 띄는 현상이다. 이는 회담이 실질적으로 타결단계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돌아보니 대표46명중 신성모 임병식 장기영 장경근 배의환 임송본 유태하 이홍식씨등 많은 인사들이 고인이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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