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권좌, 군부 방패로 지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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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피살사건을 계기로 필리핀 안의 정국은 극도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야당 진영에서는 「아키노」의 죽음이 「마르코스」정권 종말의 시작이라면서 재야 세력의 일치단결을 호소하고 있는 반면 현 정부는 이 사건의 충격파를 줄이기 위해 몹시 고심하고 있다.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필리핀 정국의 향방을 가름하기 위해 필리핀 정치의 어제와 오늘, 집권당과 야당의 판도, 군부의 현황등을 조감해 본다.

<여당세력>
필리핀도 표면적으로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은 46년7윌4일 독립과 함께 제1공화국이 탄생되면서 미국식 민주정당 정지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상하 양원의 의회제도에 임기 4년의 대통령도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도록 헌법에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민주제도는 69년 「마르코스」 대통령의 재선과 함께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현재 필리핀에는 「마르코스」가 이끄는「신사회 운동 이라는 여당을 비롯하여 야당세력인 사회민주통일당·자유당·국민당·공산당등 10여개 정당이 난립하고 있으나 72년 계엄령이후 단원제로 바뀐 의회는 여당측의 독무대를 이루고 있다.
단원제인 필리핀 의회 의석은 2백석인데 야당의석은 거의 없고 대부분을「마르코스」의 여당세력「신사회운동」파가 차지하고 있다. 「아키노」 전 상원의원이 중심이 됐던 「인민의힘」연합전선은 78년 선거에서 21명의 후보를 내세웠으나 전원 낙선의 고배를 마셔 당시 야당측은 이 선거가 전무후무한 부정선거라고 주장했었다.
78년에「마르코스」가 주도하여 결성한 「신사회운동」 조직은 선거운동단체이기는 하지만 엄격한 의미의 정당은 아니며 당강령도 없다. 「마르코스」는 72년 계엄령 선포 이전까지 50년대 이후 필리핀에서 계속 집권해 온 국민당 소속이었으나 신사회운동조직 창실이후 탈당, 국민당은 야당세력으로 바뀌어 8l년 5월에는 「살바도르·로렐」파가 친 「마르코스」 파를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여당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야당은 국민민주연합(UNIDO) 이라는 기구에 총결집했다.
야당지도자들은 그러나「마르코스」가 9년 동안이나 지속된 계엄령 아래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81년의 계엄해제 이후에도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입법권마저 사실상 장악하는 등「마르코스」가 독재정치로 일관해 온데 반발, 선거를 보이코트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마르코스」정권의 당면한 과제는 84년 6월로 예정된 국민의회선거. 「마르코스」는 이 선거를 통해 제4공화국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반정부 세력과의 화해 분위기 조성등을 시도하려 했었다.
그러나 경제의 계속된 악화는 정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고 반대파들의 비난 또한 날로 드높아져 「마르코스」정권은 화해 대신 강경조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따라 상호 협조적 정당정치를 확립하겠다고 공언한 「마르코스」의 약속과는 달리 정권과 반정부세력간의 대립은 날로 심화됐다. 이같은 곤경에 빠진「마르코스」는 정권유지를 위해 군부의 힘에 의존하는 등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군부와의 관계>
「마르코스」대통령의 권력유지에 군이 얼마나 깊이 관여하고 있는가는 그가 대통령이 된 이래 군사력의 비약적인 신장세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필리핀군총병력은 계엄령전인 71년3만4천6백명이었는데 현재는 15만8천명이다.
이달초「마르코스」대통령이 모습을 감춰 중병설이 나돌았는데 중순에 모습을 나타낸 「마르코스」는 그동안「베르」군참모총장이 장관을 겸임하고있는 국가정보공안청 (NISA) 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정부각료의 대부분은 대통령의 소재를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
78년 「이멜다」 부인의 수상취임설이 나돌았을때 사관학교출신의 군간부들이 강경히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후 군내의 인사공작은「이멜다」체제로 굳어져 81년8월 「베르」대통령친위대장이 참모총장으로 발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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