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추적] 발전 모델 고심하는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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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모델을 택하는 것이 좋은지를 제안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경제전문가인 칼럼니스트 볼프강 문초가 파이낸셜 타임스(FT) 24일자에 기고한 유럽 정상회담 관련 글의 첫머리다. 정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나라든 성장과 복지를 모두 잡고자 한다. 그러나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쉽지 않다. 유럽을 대표하는 영국.프랑스.독일 등은 모두 국내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유럽의 발전이란 목표는 같아도 각국의 주장은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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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경제=유럽의 위기감은 세계화 추세에 뒤처진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미국과의 격차는 벌어지고, 중국.인도라는 두 거인은 뒤쫓아오고 있다. 반면 유럽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져 있다. FT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유럽의 성장률은 중국.인도의 4분의 1, 미국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2003년 유럽의 국내총생산(GDP)이 0.9% 성장한 반면 같은 선진국 미국과 일본은 각각 3.0%, 2.5% 성장했다. 유럽의 실업자는 이제 2000만 명에 육박한다. 이 중 절반이 1년 이상 실직상태에 있다. 청년실업률은 18.6%나 된다.

◆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논쟁 촉발=블레어 총리는 지난 7월 유럽연합(EU) 순번의장국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유럽대륙을 향해 '앵글로색슨 모델을 선택하라'고 촉구했다. EU 정상회담 의장으로서 유럽의 발전을 위한 의제를 선점하려는 의지다.

블레어 총리는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피가로에 기고한 칼럼에서 "경제 활력이 넘치는 유럽 건설을 위해 농업보조금을 줄이고 연구개발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업보조금은 블레어가 주창하는 개혁대상 1순위다. EU의 농업을 보호하기 위한 농업보조금이 경쟁과 개방의 신자유주의 모델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블레어는 농업보조금을 '농업국가인 프랑스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만든 시대착오적 정책'으로 간주한다. 블레어 총리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배경은 영국의 상대적인 경제호황이다. 영국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최근 수년간 3~4%의 성장률을 기록해 왔다.

◆ 라인란트 모델 고수하는 프랑스=최근 프랑스에서는 농민들의 생존권 보호 문제가 최대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도하라운드 협상에서 프랑스는 "EU가 농산물 수입품에 대한 관세와 농가에 지급하는 수출 보조금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프랑스 국민 다수가 앵글로색슨 모델에 반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난 5월 프랑스에서 유럽헌법 국민투표가 부결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프랑스 국민은 유럽헌법이 앵글로색슨 모델을 담고 있다는 점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헌법이 통과되면 복지가 줄어들고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해 반대표를 던졌다.

프랑스의 대권주자인 니콜라 사르코지 내무장관의 태도변화도 이런 여론의 반영이다. 올 초만 해도 사르코지는 앵글로색슨 모델의 장점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곤 했다. 그런 그가 최근 프랑스 경제일간지 레 제코에 보낸 기고문에서 앵글로색슨 모델을 비판했다. 그는 농가에 대한 수출보조금을 삭감하려는 영국 출신 피터 만델슨 EU통상담당 집행위원의 제안을 "바보 같은 거래"라고 비난했다.

◆ 어정쩡한 독일=지난달 18일 독일 총선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유럽 좌파 정치인들은 일제히 앙겔라 메르켈 후보의 패배를 "앵글로색슨 모델의 패배"라고 주장했다. 메르켈은 앵글로색슨 모델을 주창해온 독일의 우파 정치인이다. 독일 경제의 지지부진으로 메르켈의 앵글로색슨 모델 주장은 힘을 얻었고 총선에서 압승이 예상됐다. 그런데 막상 총선 결과 메르켈은 집권 사민당(SPD)에 1% 차이로 어렵사리 이겼다. 그러자 유럽의 좌파들은 메르켈의 부진을 앵글로색슨 모델의 패배로 간주했다. 이는 곧 유럽전통 라인란트 모델에 대한 독일인들의 애착이라는 풀이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EU 집행위 중재안은

"유럽의 사회모델을 버리지 말라. 대신 개혁하라." 사회모델 논쟁에 대해 EU 집행위원회가 내린 '중도 처방'이다. 이는 기존의 라인란트 모델을 개혁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분히 앵글로색슨 모델에 가깝다.

EU 고용.사회 담당 블라디미르 슈피들라 집행위원은 6일 FT 기고문에서 "앵글로색슨 모델과 유럽식 모델에 대한 논쟁은 잘못된 이분법에서 출발한 것"이라며 "두 모델 모두 나름의 장단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혁의 목적은 유럽 사회모델을 받쳐주는 가치들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제도들이 작동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노동시장 개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EU와 회원국 정부가 실업을 우려해 보호주의 장벽을 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사회보장과 경제적 유연성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실직한 노동자가 새 일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 평생교육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덴마크.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슈피들라 위원은 "평등과 효율이 상충관계에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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