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라에는 그나라만의 광고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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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자동차 경주 F1을 소재로 한 탁송회사 광고. 유럽에선 히트작이었으나 국내에서는 F1이 생소해 한달 만에 광고를 내렸다.

한 다국적 제약사의 독감 백신 광고. 한국 광고(아래)에는 유럽에서 볼 수 있는 바이러스 형상과 제품의 효능 설명이 전혀 없다.

한 탁송회사 광고. 제작에 41개국 관계자가 관여했다.

"이대로는 한국에선 통하지 않을 텐데…." 올 7월 영국 본사의 독감 백신 인쇄물 광고를 받아든 제약사 한국GSK의 광고 담당자는 고민에 빠졌다. 본사가 만든 광고에는 백신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설명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거기에 바이러스를 크게 확대한 그림이 곁들여 있었다. 주부를 대상으로 한 광고인데 설명이 너무 학술적이고 바이러스 그림은 징그러웠다. 한국GSK 담당자는 이런 내용으로는 한국에서 먹혀들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담당자는 "한국 주부들에게는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효과가 있다"고 본사를 설득해 광고를 국내에서 자체 제작했다. 가족 사진과 함께 '가족의 행복은 건강에서 시작합니다. 지금 준비하세요! 독감 백신'이라는 문구를 실었다. 가족을 아끼는 주부의 감성에 호소한 것이다. 이 회사는 지난달부터 잡지 등에 이렇게 한국화한 광고를 싣고 있다.

'글로벌 시대'지만 광고에는 국경이 있다. 나라마다 소비자 성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들은 대체로 광고만큼은 현지에 어울리게 따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나라마다 광고를 제각각 만들면 비용이 많이 든다. 이 때문에 일부 기업은 여러 나라 광고 담당자들이 함께 아이디어를 짜내 광고를 만드는 방법도 활용하고 있다.

탁송회사 DHL은 아태.유럽.북미 등으로 나눠 지역별 공용 TV 광고를 만든다. 나라별로 제작할 때보다 비용은 줄이는 반면 문화가 비슷한 지역끼리 묶어 광고를 어느 정도 소비자 입맛에 맞추겠다는 것이다.

아태 지역 TV 광고를 만들 때는 소속 41개 국가 마케팅 담당 직원들이 동시에 국제 전화로 회의를 한다. 개요만 던져주고 광고 내용을 어떻게 담을 것인지는 나라별 의견을 잘 반영하는 식으로 현지화한다. 지난해 10월 전화 국제회의 때는 아태 본부가 '정글에서도 길을 찾아 물건을 배달한다는 게 큰 줄거리'라는 것만 미리 알려줬다.

회의에서 DHL코리아의 백승문 과장이 "코끼리가 짐을 싣고 가게 하면 눈길을 확 끌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당장 동남아 국가들이 반박했다. 그쪽은 흔한 게 코끼리여서 관심을 끌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아예 "우리 고객들은 정글이나 시골을 싫어한다. 차량이 빽빽한 도시를 배경으로 광고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백 과장은 "그날 3시간 가량 전화 회의를 했다"며 "넉 달 동안 그런 회의를 10여 차례 한 뒤에야 광고 내용이 결정됐다"고 전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요즘 국내에서 방영되는 TV 광고다. 정글 속 좁은 도로가 차량으로 꽉 막히자 배달원이 전화로 본사의 안내를 받아 정글을 뚫고 나가 공터에 임시 착륙한 DHL 화물기를 만난다는 내용이다.

DHL코리아 관계자는 "독일 본사에서 만든 신문.잡지용 광고를 그대로 내보냈다가 재미를 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지난해 9월 한 달간 게재한, 자동차 경주 F1을 소재로 한 광고가 그것이다. DHL의 배달 속도가 F1 경주 차량에 비길 만큼 빠르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다.

F1이 유럽에서 축구와 더불어 최고 인기 스포츠라는 점을 염두에 둔 광고였다. 이 광고는 유럽에서는 시선을 끌었으나 F1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한국에서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DHL코리아는 지난해 9월부터 연말까지 넉 달간 게재하려던 것을 9월 한 달만 내보내고 일찍 접었다.

대형 컴퓨터용 저장장치 전문회사인 한국EMC는 거의 대부분의 광고를 국내에서 자체 제작한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 등을 모델로 삼은 인쇄물 광고가 대표적이다. EMC제품인 '기록 장치'와 '기록의 역사'의 연관성을 살린 광고다. 이 회사 백영훈 마케팅 차장은 "미국 본사에서 만든 광고는 문화 차이로 메시지를 알릴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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