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북침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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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하느님, 총이 없는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 주옵소서』
이승만대통령이 매일 밤 피난지 대구에서 절규한 기도다.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프란체스카」여사의 비망록 『6·25와 이승만대통령』에는 그런 생생한 증언이 실려 있다.
사실 6·25전쟁에서 한국이 처한 입장은 그처럼 한심스런 것이었다.
6·25전쟁이 나고 단 한달도 못되는 시기에 전쟁 당사국의 최고책임자가 읍소한 소리라면 그 전쟁의 양상은 삼척동자라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벌써 전쟁발발 사흘만에 수도가 함락되고 정부가 피난길에 올랐다면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전쟁을 계획·준비하고 선제기습을 한 쪽이라면 전쟁발발 한달도 못되는 이 시기엔 승승장구하는 전황을 즐기며 만세를 불러야 할 것이다.
사실상 6·25를 겪은 사람들은 북괴군의 우세한 병력과 무기, 그들의 신속한 진격상황을 보면서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지 눈감고도 알 수 있었다.
개전초기 북괴군은 탱크 2백42대, 전투기 2백여대를 포함해 대포 1백72문, 곡사포 1천2백58문을 보유한 16만명의 인민군과 3만4천명의 보안군을 갖고 있었다.
그에 비해 한국군은 9만7천명. 그나마 그 병력은 비행기도 탱크도 한 대 없이 38선과 전국에 분산 배치된 형평이었다.
북한은 이같은 압도적 군쟁력외에 북한·소련비밀군사협정, 북한·중공방위협정의 보장을 받고 있었고 군사훈련도 완료된 상황이었다.
그에 비해 한국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모호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l949년3월 『대평양방위선을 필리핀과 유구열도를 통과하는 도서선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국무장관 「에치슨」도 50년1월 마찬가지 발언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쪽은 분명한 것이다.
「페렌버크」의 『이런 전쟁』에는 공산군이 벌써 6월15일에 38선의 출?선에 배치되고 있었으며 18일엔 러시아어로 된 정찰명령, 22일엔 한국어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고 쓰고 있다.
유엔은 안보이사회를 열고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그때 안보의 결의에 앞서 북한대표의 진상설명을 들어야한다고 고집했던 대표단이 있었다. 공산국 유고슬라비아 대표였다.
그 제안은 부결되고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한 안보이의 결의가 나왔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을 두고 북한과 공산측은 계속 한국의 「북침설」을 날조, 주장했다.
역사적 진실의 악랄한 조작이다.
최근 바로 그 유고의 공산당기관지 브에스닉이 공산권에선 처음으로 6·25 33주년 특집기사에서 북한의 남침을 비로소 시인한 기사는 격세의 느낌을 갖게 한다.
33년전에 호도했던 진상을 이제 스스로 뒤엎은 것은 아주 장한 일이다.
역사의 진실을 늦게나마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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