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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이 없는 항일의병 돌무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의령=이근성기자】 마을에서 오르는 길은 lkm 남짓했으나 장마끝의 땡볕더위 때문인지 땀이 비오듯 했다.
산중턱의 돌밭까지는 산발한 가시덤불들도 한에 서린듯 날카롭게 거부하며 좀처럼 질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구한말 「의병전투」 가 일어난지 75년, 그리고 해방된지 38년된 오늘까지 철저하게 버려진 외혼의 현장.
당시 순절한 의병들의 시체가 돌무더기에 묻힌채 방치된 의령신덕산 기슭의 돌밭 「상걸 너더란」(세갈래의 돌밭이란뜻의 산골명) .
인적이 피해간지 오래인 돌밭의 가시덤불 사이로 이끼낀 3기의 돌무덤을 찾아냈다.
경남 의령군 가례면 양성리마을에 의령부대가 들어온 것은 무신년 (1908년) 5윌8일 (음력) .
안양출신 의병장 문태서장군 휘하의 부대 20여명으로 전해진다.
양성리는 갑을리와 함께 8백여m 높이의 자굴산을 머리에 두고 신덕산등이 숨가쁘게 둘러싼 산골마을.
의령으로 통하는 20리길을 빼고는 온통 산으로 병풍친 분지를 이룬다.
지리산·덕유산·장매산에 터를두고 유격전을 벌였던 의병부대로서는 가장 남쪽까지 진출한 부대였다.
이날 자굴산의 쇠목재를 넘어와 양성리에 도착, 마을가의 덕양제 (김해김씨의 제실)예 짐을 푼 의병들은 마을주민들로부터 저녁대접을 받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눈치채고 잠복해온 의령주재 일본헌병대는 덕양재에 불을 지르고 공격을 가했다.
새벽의 기슴으로 의병중 9명이 전사하고 5∼6명이 부상했다.
의병들은 위기를 맞아 부상병을 메고 신덕산의 부재재를 넘어 궁류방면으로 피해갔으나 9명의 시체는 마을에 버렸다.
마을사람들은 이들을 화적들이라고 매도하며 접근을 막는 일본헌병대의 눈을 피해 급한대로 시신들을 신덕산 기슭의돌발 「상걸 너더랑」 에 합장, 3개의 몰무덤을 만들었던 것.
5년전에 작고한 마을유림 이종화씨가 써서 남겨 현재 이마을 주판수옹 (76) 이 보관중인「무신의거략기」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의병이 합천 삼가를 거쳐 5월8일 하오 양성리에 도착, 주민들에 술과 밥을 달라고 부탁한후 덕양재에 여장을 풀었다. 이들이 이곳에서 잠을 자고있는데 새벽에 왜병이 기습, 재실을 불태우고 포화를 쏘아 9명이 죽었다.』
이마을 김영규옹 (90) 도 이날의 사건현장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내나이는 15세였지. 소를 먹이고 돌아오자 집에서 덕양소손님에게 밥을 갖다 주라고해서 밥상을 가지고 갔어. 재실 앞마당에 가니 총은 여러개 모아 세워두었고 방안엔 베적삼을 입은 장정들이 모여있더군.
다음날 새벽 총소리가 진지를 진동했는데 아침에 나가보니 9명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마을 어른들이 이들 시체를 거두어 「상걸 너더랑」에 돌무덤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고 김옹은 증언했다.
마을사람들은 10여년전까지만해도 방치된 돌무덤 근처에 유골들이 뒹굴고 있었다고 전했다.
문봉서의병장은 그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경남· 전남지역에서 일군과 싸워 전과를 거둔 끝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가 19l3년 자결, 순국한것으로 전하고 있다.
한편 현장을 확인한 박종대교수 (경남대박물관장) 는 『문장군의 순국으로 그의 행적이 많이 가러져 있는점이 안타깝다』면서, 『양성리전투의 기록이 묻혀있음은 물론 순절한 의병들의 무덤이 지금까지 방치돼 있는것은 부끄러운일』 이라고 말했다.
국사편찬위 박성수편사실장은 지금까지 의병장들의 유적은 다수 보존되고 있으나 이름없이 싸운 의병들은 별 흔적을 남기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 돌무덤의 가치를 크게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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