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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발굴자료와 새 증언으로 밝히는 일제통치의 뒷무대-3·1운동(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동경유학생들의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기폭제였다.
유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한 것은 1918번 연말 파리장화화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부터다.
명치대의 김안식·최원순·김광호, 동양대의 김현준은 거족적 항일운동을 유학생들이 선도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같은시기 이광수가 북경에서 도오꾜로 들어왔다.
이광수는 그해 11월말 서울에서 현상윤을 만나 국제정세를 전하고 이 시기에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역설하고 곧장 도오꾜로 들어온 것이다.
그는 동경유학생 사이에 영향력이 큰 최팔용·백관수등을 만나 최근 정세에 대처하는 행동에 대해 논의를 했다.(이광수 『기미년과 나』)
그럴때 조그만 사건이 있었다.
일본정부는 친일선교사인 「미리먼·해리스」를 파리에 보내 조선대표의 파리에서의 활동을 방해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를 찬양하는 선전활동을 벌이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다.
「해리스」는 감리교 동양총감독으로 당시 청산학원교수로 있었다.
일어에 능통한 그는 일본정부로부터 일찌기 훈3등을 받았으며 통감부시절 (1908년)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보호통치는 천명』 이라고 하여 큰 말썽을 일으켰던 장본인이었다.

<헤리스 파리행저지>
「해리스」의 파리파견소식을 맨먼저 알아낸 이가 청산학원의 윤창석이었다.
그는 어느날밤 단도를 품고 「해리스」의 숙소로 찾아가 반위협조로 그를 설득, 그의 파리행을 좌절시키는데 성공했다. (윤창석 『나의 백서』)
유학생들간의 논의는 점자 그폭이 넓어졌다.
의견은 두갈래, 당장독립투쟁에 나서야한다는 주장과 우선은 자치를 요구하자는 점진론이었다.
점진론은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대한 불신에 바탕했다.
동경고사의 서춘은 『미국이 입으로는 민족자결을 외치지만 흑인·인디언등 그들 국내문제및 쿠바·필리핀등의 식민지유지등 제국주의속성을 버리지않고 있잖으냐』고 했다.
당시 급진론의중심인물은 최승만·변희용·김안식, 온건론은 백남기·유창승·박석윤등이었다.
그랬지만 대세는 독립의 요구였다.
○…그해 l2월19일 명치회관에서 유학생망년회가 열렸다.
좌석이 무르익으면서 과격한 말들이 오갔고 급기야 이를 제지시키려는 한인밀정 선우갑과 유학생들 사이에 치고받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다음날인 30일 유학생들은 YMCA회관에서 동서연합웅변대회를 열었다.
연사는 이종근·윤창석·김상헉·서춘등으로 이들은 조선은 이제 독립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할것을 역설했다.
연설회는 끝났으나 학생들은 흩어지지 않고 새벽1시가 넘도록 행동계획을 토론했다.
의견이 분분했다.
결국 11인의 대표를 뽑기로했다.
최팔용·백막수·윤상석·서춘·김철수·김상덕·이광수·송계백·이종근·최호우·김도연이 대표로 선출됐다. (김도연 『나외 인생백서』)
이럴 즈음 상해에서 장덕수가 들어왔다.
그는 김규식의 밀령을 받고 한발 앞서 들어온 조소앙과 합류, 최팔용등과 접촉하고 김규식의파리행등 상해소식을 전했다.
뒤이어 여운홍이 들어왔다.
프린스턴대학원에 재학중이던 그는 본국에 들어가 독립청원 1백만인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로 보내라는 안창호의 밀령을 받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김도연은 회고에서 당시 장덕수는 독립운동은 국내외가 일시에 호응해 일으켜야 한다면서 유학생들이 조급하게 서둘다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했다.
○…유학생 대표들은 거사계획을 구체화했다.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하고 그 이름으로 독립선언서·결의문·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발표하기로 했다.

<송계백 자금조달>
문안작성은 이광수가 맡았다.
이광수는 이미 『무정』을 발표 한국현대문학에 새로운 장을 연 바있어 화려한 문명을 날리고 있던터라 가장 적격의 인물이었다.
뿐만아니라 일어·영어에도 능숙해 일본정부에 제출할 문서와 해외에 발송할 문서의 번역까지 도맡았다.
백관수는 문서의 인쇄를 맡고, 최팔용은 본국에 연락할 학생의 선발책임을, 그리고 윤창석은 유학생들끼리의 단결·연락유지를 맡았다.
영문으로 번역된 문서는 미국인선교사 「헨리·랜디스」가 교정을 맡아주었다.
그와 이광수는 명치학원중학부 시절부터 사제관계에 있었는데 영문초고를 봐주면서 『애국운동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는 것이니 힘껏 노력하라』고 격려했다.
국문으로된 선언서는 일본에서 인쇄할수 없어 부득이 본국으로 사람을 보내야했다.
와세다대 송계백이 이일을 맡았다.
그는 인쇄뿐아니라 서울의 독립운동진영과의 연락, 그리고 자금조달의 책임까지도 맡았다.
○…송계백은 1월말께 서울에 도착, 보성중학교장 최린을 찾았다.
송계백은 보성출신으로 최린과는 사제지간이었다.
송계백은 최린을 통해 송진우·현상윤·최남선등과 연결되어 도오꾜에서 준비하는 거사내용을 설명했다.
정노식으로부터는 거사에 필요한 자금 일부, 그리고 선언문 인쇄에 쓸 활자를 얻었다.
송계백은 서울을 떠날때 정노식에게 거사계획가 확정되면 암호전문을 띄우겠다고 약속했다.
즉 「○○원에 샀다』는 내용의 전문이 오면 그 금액은 바로 거사날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후에 송계백은 서울로 『28원에샀다』는 전보를 정확히 타전했다.
거사자금은 송계백이 마련해온 것말고도 이광수가 김석황으로부터 2백원, 그리고 김마리아·현덕신·청산학원생들로부터 상당한 금품이 들어왔다.
독립선언서 인쇄는 송계백이 가져온 활자만으론 활자수가 부족해하는수 없이 선언서와 결의문은 손으로 직접 썼고, 영문청원서는 타자기를 사용했다.
등사인쇄는 호총정에 있는 정측영어학교생 김희술의하숙, 그리고 일본국회에 보낼 민족대회소집청원서활자인쇄는 「이달」인쇄소에서 인쇄했다.
○…2월8일 유학생들은 조선YMCA회관에 모였다. 유학생총회라는 명목의 집회였다. 하오2시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했다.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김도연은 결의문을 읽었다.
결의문은 독립을 위한 조선민족대회 소집을 제안하고 독립의 요구가 실패할때는 일본에 대해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고 했다. 준비된 문서들의 채택에 이어 연설이 있었다. 그러곤 시가행진을 위해 태극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이때 일본경찰이 난입해 학생들과 난투극이 벌어졌다.
유학생감시역이던 일본경시청 고등계의 한인형사 선우갑은 그 수라장속에서도 문제학생을 하나하나지적, 남김없이 체포했다. 현장에서50여명이 연행되어 수감되었다. 이들은 3∼4일 동안 엄중한 취조를 받은후 거사준비를 맡고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10명만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학생주모자를 가려내는데 공을 새운 선우갑은 그후도 도오꾜에서 얼맛동안 활동하다 상해로 옮져 밀정노릇을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던 김구에게 붙잡혔다.
이때 그는 다시는 밀정노릇을 않겠다고 애걸복걸해 풀려났으나 그후도 밀정노릇을 계속했다. (「백범일지』)
○…유학생들의 2·8선언은 해외에 널리 알려졌다.
거사준비팀은 선언문등이 완성된뒤 해외홍보를위해 이광수를 미리 상해로 보냈다.
그는 1월3l일 고오베항을 출발, 2월5일 상해에 도착했다.
이광수는 영문으로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파리에가있던 「월슨」 「클레망소」 「로이드·조지」 등 연합국의 3거두앞으로 보냈다.
이어서 이내용을 상해에 있는 미국계신문 『차이나 흐레스』와 영국계 『노드차이나 데일리뉴스』에 알려 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2월9일자 『노드차이나 테일리뉴스』는 「조선청년들의 열망」(Young Korean'S Ambition)이라는 제목으로 도오꾜한인유학생들의 거사소식을 게재했고 다음날자 『차이나프레스』에도 상세한 내용을 실어 이소식이 전세계로 전파된것이다.
○…2·8선언의 대표자들이 수감되어 있는동안 후속거사가 뒤따랐다. 최승만·변희용·장인환등은 민족대회 소집을 촉구하는 선언서를 마련했다. 2월12일 1백여명의 유학생들은 히비야공원에 모여 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일본경찰은 이달등 13명을 체포하고 강제해산시켰다.
유학생들은 2월4일에도 히비야공원에서 민족대회소집촉진대회를 열었다. 이대회에는 1백50여명의 유학생이 참여했으며 일본경찰은 16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2·8선언의 주동자들은 경시청에 이송되어 1주간 취조를 받은뒤 사곡구형무소로 이감되었다.
이때 수감되었던 김도연은 뒷날회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취조관들은 상부의 특별지시를 받은듯 말씨도 부드러웠다. 그들은 처음엔 내란죄에 해당된다는등 엄중한 경고도 했지만 회유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들은 국제여론 때문에 우리들 학생을 내란죄로 다스릴수도 없고 그렇다고 처벌하지 않을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인듯했다. 그들은 상부의 방침을 기다리느라 미결수로 둔채 우리를 협력자로 설득하려 했지만 우리들중 단 한사람도 그네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내란죄에 의한 7년형쯤을 각오하고 있었다』

<해외에도 널리알려>
이 회고 그대로 학생들은 법정에서 검사의 심문에 주저함아 없이 생각하는바를 그대로 답변, 젊은 학생들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예를들어 2·8선언의 결의문중 일본과의 영원한 혈전에 대해 묻는 검사의 질문에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일본이 받아주지 않으면 그에 대항해 우리가 취할수 있는 행동이란 그길 말고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라고 도리어 반문했다.
체포된 학생들이 수감돼있는 동안 밖에 있는 학생들은 사식·침구를 보내거나 돈을 영치시키는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YMCA총무백남훈은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조선문제에 동정적인 일본인들 (금정가행·작간경조·학택린명·포시신치등)과 교섭, 무료로 병호를 맡도록 주선했다.
이들 일인변호인들은 『조선학생의 신분으로 자기나라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 일본법률의 내난죄에 해당하는가?』고 따지고 『세계적으로 민족자결의 사조가 팽배하고 있는 오늘날 국제정세에 비추어 이들의 주장은 극히 정당한것이니 벌할수 없다』고 변호했다.
결국 주동자들에겐 내란죄아닌 출판법위반죄를 적용, 9개월에서 7개월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유죄가선고되어 기결수로 바뀌자 대우는 일변해 사식은 금지되어 그위에 반역자들이라해서 눕지도 못하고 온종일 앉거나 서서만 지내도록 고통을 가하는 이중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일본에서의 운동이 좌절되자 유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본국·중국으로 가는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919년 5월까지 모두 3백∽명이 본국으로 돌아와 3·1독립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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