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버리고 축구와 '승부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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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국(왼쪽 둘째)·안상현(中) 등 안양의 20세 이하 선수들이 숙소에서 영어 수업을 하고 있다. [안양 LG 제공]

'소년 프로축구 선수'가 늘고 있다. 고졸은 물론 중졸 선수도 늘어나더니 현재는 중학 중퇴 선수도 국내 프로팀에 12명이나 된다. 구단에는 일찌감치 유망주를 확보해 오래도록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수에게는 좋은 환경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역 기피 의혹, 중도 탈락시 사회 부적응 등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학생 선수들의 조기 프로 진출 장단점과 바람직한 해결방안을 찾아본다.

이래서 좋다

지난해 10월 중학교를 자퇴하고 수원 삼성에 입단한 신영록(16)은 올해 초 오른쪽 무릎 연골이 파열됐다. 지난 3월 일본에서 수술을 하고 현재 경기도 수지의 삼성재활센터에서 재활훈련을 하고 있는 신영록은 "의사 선생님이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셔서 안심하고 훈련하고 있어요. 학교에 있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죠"라며 편안한 표정이다.

삼성 스포츠과학지원실장인 안병철(46) 박사는 "대학 졸업 후 입단하는 선수들은 혹사로 인해 무릎 연골과 발목 인대가 크게 상해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선수 생명 단축으로 이어진다. 유소년 선수는 성장 속도에 맞게 훈련량과 프로그램을 조절해야 하는데 대회 성적이 우선인 학교 팀에서는 이를 기대하기 힘들다"며 선수 조기 선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난 9일, 오후 훈련과 저녁 식사를 마친 안양 LG 2군 선수들은 경기도 구리시 숙소 근처의 컴퓨터 학원으로 몰려갔다. 매주 금요일은 컴퓨터 교육이 있는 날이다. 이들은 문서작성.홈페이지 관리.자료 다운로드 등 컴퓨터 기본 활용법을 익힌다. 매주 월.화요일은 숙소에 강사를 초빙해 두 시간씩 영어 단어와 기초 회화를 배운다.

안양 구단은 지난 3월부터 20세 이하 선수를 대상으로 영어.컴퓨터 교육을 시작했다. 저명인사를 초청해 인성.예절 교육도 실시할 예정이다. 안양 한웅수 단장은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어진 대신 사회 생활에 필요한 기본 요소를 가르치고 있다. 이런 것들을 배우는 게 두뇌를 자극해 기량 향상에도 도움이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안양 팀의 막내인 고명진(15)은 "어차피 학교 축구팀에 있다 보면 공부를 따라가기 힘들어요. 수업에 들어가도 운동부는 별도 숙제를 줘 자습을 시켜요"라고 말했다. 졸업장을 따기 위해 혹사당하며 학교 팀에 있는 것보다는 '학력'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프로팀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게 이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이건 문제다

지난 3월 16일 방송된 한 TV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중학 중퇴 프로축구 선수'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이 프로그램은 "일부 구단이 유망주를 '입도선매'하기 위해 중학 선수들에게 접근하고 있으며, 병역 면제를 위해 졸업하기 몇 달 전에 자퇴를 하도록 유도한 의혹이 있다"고 보도했다. 현 병역법에는 중학교를 중퇴하면 군 면제를 받게 돼 있다. 이 프로그램은 또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이들이 운동을 중간에 그만두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해당 선수의 부모와 구단은 "군 면제를 위해 중퇴한 것은 아니며, 하루라도 일찍 프로팀에 보내기 위해 결정한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들이 학교를 자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병역을 면제받게 된 것은 사실이며, 이는 불법은 아니지만 병역 회피라는 비난에서 놓여나기는 어렵다.

사실 이들이 중도에 축구를 그만두게 될 경우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지도 걱정스럽다.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고 있지만 취업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결국 선수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

한 중학교 중퇴 선수의 어머니는 "사실 중학교 졸업장도 못받고 프로에 뛰어든 아이를 보면 자식 장래를 놓고 내가 모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불안해했다.

지역 밀착 프로팀서 유소년 클럽 활성화

'중학 중퇴 프로선수'가 생기는 것은 엘리트 선수의 배출원(源)이 학교 축구팀에서 클럽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과도기적 현상이다.

그동안 학교 축구부는 우수 선수를 키워 상급 학교와 프로 팀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보니 선수들은 수업을 전폐하고 훈련에만 매달리는 '운동 기계'로 전락했다. 지도자가 성적에 매달려 선수들을 몰아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프로축구가 20년 역사를 쌓으면서 점차 클럽이 우수 선수를 자체 육성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다. 현재 대다수 프로팀은 유소년 클럽을 만들어 선수를 키워내고 있다.

앞으로는 프로 클럽들이 지역에 뿌리를 두고 유소년 클럽을 활성화해 학생들이 방과 후에 훈련을 하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

곽성호 SBS 해설위원은 "선수를 조기발굴해 팀에서 축구와 인성을 동시에 가르치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장기적으로는 프로팀이 지역과 연결돼 그 지역 유소년들을 발굴하고 나이별로 체계적으로 지도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양=정영재 기자, 수원=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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