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체육인으로 많은 활약 남북체육대결서 승리 이끌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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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김택수IOC위원은 한국정치와 스포츠의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그가 사회적으로 부각된것은 5·16후. 공화당의 창당작업에 민간인으로서 핵심인물의 하나로 활약했으며 63년 6대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 공천으로 당선되어 건설위원장직을 맡아일약 정계에 중진으로 등장했다.
스포츠계와는 61년 경남체육회장에 취임함으로써 인연을 맺었다.
67년 7대국회의원에 재선되고 69년 공화당원내총무를 맡았다.
김위원은 71년 격랑의 정계로부터 물러나 대한체육회장으로 선임돼 한국스포츠의 총수가 되었으며 불같은 성격과 정치에의 정열을 대신 스포츠육성에 쏟았다.
79년2월까지 체육회장직을 3번 연임한 김위원은 국제무대에「소수정예」와「메달지상주의」를 고집, 스포츠계 일각으로부터 비난도 받았으나 결국 72년 테헤란아시안게임을 비롯, 일련의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서 북한과의 스포츠대결을 줄곧 승리로 이끄는 성과를 올렸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선 해방후 최초의 금메달읕 획득하는 쾌거를 성취하기도 했다.
김의원은 경기력향상 외에 태릉선수촌의 운영확립, 유공체육인에 대한 경기력향상, 연금창설등 공적을 남겼다.
77년 IOC위원으로 피선된후 79년 10여년만에 정계로 복귀(10대국회의원당선) 하면서 체육계를 떠났다.
스포츠맨이기에 앞서 김위원은 정치인으로서 많은 파란을 겪고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69년 3선개헌당시 개헌에 반대하는 입장이였던 그는 공화당원내총무로서 개헌반대동료들을 설득하여 끝내 개헌작업을 성공리에 마쳤으나 8대국회의원 공천을 받지못해 이후부터 78년10대의원 선거때까지 거의10년간 정치적 공백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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