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기업과 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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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교육이나 훈련만으로 훌룽한 2세 경영인이 되는것은 아니다. 물론 기본자질이 첫째겠으나 어디까지나 업이니만큼 운이 따라야한다.
승계받은 2세 경영인이 무능해서 사세를 기울어뜨린 경우도 있겠으나 연이 따르지 않는한 달리 방도가 없다. 사실 사업에 관한 한 능력과 운수를 확연히 구분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야옳을 것이다.
어쨌든 창업자 시대에 비해 2세에 들어서면서 사세가 축소되었거나 기우는 감이 드는 기업군들도 적지않다.
최근 부동산 재매입사건을 계기로 스스로 대대적으로 자체수술을 하겠다고 선언한 효성그룹을 비롯해 전자부문을 잘라낸 대한전선, 삼양타이어의 내분으로 홍역을 치른 금호그룹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른 기업들에 비해 비교적 원만하게 승계작업을 끝낸것으로 알려졌었으나 어쨌든 결과를 따져 묻는다면 선대의 사업에 흠을 낸 케이스들이다.
회사가 잘 될때라면 웬만한 상처도 대세에 묻혀 저절로 아물어 버리지만 회사가 어려우면 자그마한 흠집도 덧나서 두드러지게 마련이다.
공교롭게도 70년대 중반이후 우리경제 전체가 큰 폭으로 부침하는 바람에 기업들도 한꺼번에 풍선 늘어나듯이 확 늘어났다가 여기저기서 바람이 빠지는 경우가 많다.
효성 대한전선 금호등도 성공적인 2세 승계를 계기로 초창기에는 오히려 힘차게 사세를 뻗쳐 나갔었다.
효성그룹의 창업자 조홍제회장(77)은 자신이 느지막이 독자적으로 사업을 일으킨것과는 정반대로 2세들에 대한 기업승계는 오히려 일찌감치 끝내 놓았다.
승계직후 확장도 일종의 반작용이라고 할까.
장남 석래씨(48)와 차남 양래씨(46)는 이미 60년대부터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즉시 회사일선에 배치해서 경영수업을 시켰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회장은전체만 총괄하며 잘안되는 기업들만 챙길뿐 그룹의 주력기엄들인 효성물산과 동양나이론등은 장남 석내씨에게,한국타이어는 차남 양내씨에게 대전피혁은 막내 욱내씨에게 각각 떼어주고 실질적인 독자경영을 권장했다.아무리 형제간이라도 재산의 소유관계는 분명하게 해놓올수록 좋다는것이 조회장의 평소 지론이었다.
따라서 3형제가 경영하는 기업들은 철저한 분권주의를 택했다. 자금 인사·경영에서 완전히 따로따로였다.
막내가 하는 기업군들은 아예 이름조차 동성그룹으로 쓰고 있다.
이같은 분권화현상으로 최근 조석래회장이 발표한 계열기업정리개획에서도 동생회사들은 일체 포함되지 않았다.
어쨌든 3형제는 물려받은 기업을 의욕적으로 키워보려고 애썼었으나 종가에서 가장 먼저 적색경보가 난것이다.
장남이 이끄는 주력부대인 효성그룹은 무리하게 벌인 종합상사와 중화학투자가 결정적인 화근이였다. 차남과 막내는 업종자체(타이어및 피혁)가 워낙 심한 불황이어서 종가를 도울형편이 못되었다.
80년이후부터는 주거래은행에서도 3개를 별도그룹으로 구분 관리하고있다.
뒤늦게 조홍제회장은 장남 석내씨를 중심으로 효성이라는 한울타리로 타시 뭉쳐서 난국을 타개해 나가길 기대했으나 뜻대로 되지않았다는 후문도 있다. 이미 기업이 분가해 나가면 그나름대로 질서와 영역이 생기므로 재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업주가 하고싶어해도 여러가지 제약이 생긴다.
한편 대한전선이 가전부문을 떼내어 대우에 넘겨주고만것은 최근의 재계판도에 가장 큰변화로 기록될만한일이다. 대한전전은 창업자 고 설경동회장에 이어 2세 설원량씨(41)에게 승계되면서 치열한 가전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백기를 들고 만것이다.
설씨가 대한전선의 회장직에 오른 78년은 한창 치솟던 가전호황의 끝무렵이었고 곧이어 깊은불황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시기였다.
불황이 깊을수록 가전전쟁은 날로 심해갔다. 급기야는 거목 화신그룹이 여기에 휘말려 단숨에무너져 내렸다.
자금난까지 겹쳐 정면대결로 삼파전을 벌이던 대한전선도 자금싸움에서 열세를 보이며 차츰 처지기 시작했다. 상대방들은 그룹 총력전을 펴나가 설씨는 혼자서 싸워야했다.
대한전선도 대한방직이라는 혈연적 동계기업이 없는것은 아니나 이미 경영적으로 절연된지오래다.
고설경동씨의 장남 원식씨는 설회장이 살아있을 때부터 대한방직으로 독립 분가해나갔고 대한전선그룹은 3남 원량씨에게 승계되어 한동안 갈 뻗어나가다 이번에 수술을 단행한것이다.
대한전선의 가전부문이 대우로 넘어가자마자 가전경기가 불꽃같이 일어 대우가 톡톡이 재미를보고 있으니 역시 기업엔 운이있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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