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이승만대통령<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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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8월3일.
어젯밤에는 미군기들이 밤새도록 상공을 선회했다. 소련은 46대의 비행기를 지원, 곧 공습이 있을거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미폭격기들은 북한내의 모든 비행장을 폭격하고 비행장상공을 선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미군기들엔 또 적이 한강에 건설중인 임시교량을 폭파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며칠동안 우리는 왜 비행기들이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가를 곰곰 생각해보았다. 알고보니 이 비행기들은 목표물 상공을 4시간정도 선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확실히 이 방법은 목표물을 폭격하고 나서 곧장 돌아오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한국군 ,후퇴 거부>
며칠전 「무초」대사는 대통령에게 찾아와 『각하, 이제 우리도 무언가배우고 있읍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어젯밤에는 실로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하와이에서 새로 도착한 병력이 30여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진주외팍지대에 와있던 공산군을 격퇴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기뻐했으며 기분도 훨씬 좋아졌다.
더구나 적군은 식량과 연료, 그리고 탄약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제 미국인들이 기어코 공산주의자들을 밀어붙이겠다는 결의만 하면 되는 것이다.
오늘아침 국방장관이 와서 동부전선에 있던 2명의 한국군 대령이 후퇴명령을 거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 대령들은 지금 상황에서도 현위치를 고수할 자신이 있으며 허가만 내려지면 더 앞으로 진격할수도 있다면서 후퇴명령을 거부하고있었다. 이 대령들은 후퇴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해서나 미국인들 자신에 대해서도 자살행위나 다름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워커」 장군은 이 사태에 대해 몹시 신경을 쓴 나머지 대통령에게 아군이 왜 후퇴를 해야만 하는가를 설명하는 성명서를 내줄것을 요청해왔다.

<한국군우수성 인정>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진격할만큼 충분한 양의 미국 보급물자가 도착할때까지는, 미군만 남쪽으로 후퇴하고 한국군은 계속 현 전선을 고수하는 작전이 옳지않다는 것이다(이 당시 한국군은 안동·예천등지에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있었다).
미군들이 김천을 포기하고 왜관으로 후퇴하게 되자 전선은 더욱 남쪽으로 밀려내려왔다.
한국군 17연대의 좌우엄호를 받고 있던 일부 미군병력은 거창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어젯밤 전투를 치르고 나더니 고령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해버렸다.
그러나 한국군은 후퇴하기를 거부했다. 후퇴하던 미군들은 이들 한국군에게 무기를 남겨주고 고령으로 떠났다. 한국군은 이 무기를 들고 거창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군들은 남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기를 원했으나 후퇴한 미군들은 낙동강에 방어선을 만들고있었다.
「워커」 장군은 오늘 아침 드디어 미군과 한국군은 똑같은 무기를 제공받게 될것이라고 발표했다. 「워커」 자신이 한국군이 얼마나 열심히 싸우고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
대통령은 지난 1주일 내내 한미양국군에 똑같은 무기를 제공해야 된다고 입이 닳도록 주장해왔는데 이제서야 미국측은 무기제공에있어서 한미양국군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워커」장군은 또 한국경찰에게도 완전무장할수 있는 장비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경찰은 국군이 북진할때 도처에서 준동하는 공산게릴라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수있다는 기대에서 였다.

<친정서 격려편지>
이제서야 「워커」 장군은 한국군이 얼마나 우수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또 한국군이 없다면 미군은 아무런 일도 할수가 없었을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방어선을 좁히는것은 잘못된 전술이라고 믿고 있다. 좁은 방어선을 공격하는 적군의 힘도 훨씬 강력하게 될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미국측의 계획은 이미 수립이 완료됐고 이제 이를 실천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빈의 친정집에서 언니 「베티」가 디프레세(Die Presse)지 특파원편에 비타민과 편지를 보내왔다.
끝까지 용기와 희망을 잃지말라는 격려편지였다.
어머님은 우리나라에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근심으로 지새우고있고 한국의 자유와 평화회복을 기원하는 금식기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었다.
요즘은 친척과 이웃은 물론, 단골가게아주머니들까지도 합세, 어머님과 같이 금식기도를 올리고있다는것이다.
내가 이곳에 시집온게 1934년-. 17년동안 떨어져 그립던 어머님이다. 어머니의 인자하고 따스한 얼굴이 떠오르며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동난중 날아온부음>
어머니는 내가 대통령과 결혼하는걸 반대했었다. 독립투사와 정치가의 아내보다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기를 원하셨다. 그때도 어머니를 괴롭혔고 지금 또다시 어머니의 마음을 죄고있으니 불효막심한 딸이다. 나이많은 남편을 따라 먼나라로 시집온 딸때문에 단하루도 마음놓고 지내신적이, 없는 사랑하는 어머님…. 『이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꼭 찾아뵈올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주세요』하고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어머니는 결국 한국동난중에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사실을 아무에게도 안알렸다.
대통령은 장례에 다녀오라고 했지만 나라사정이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머나먼 빈까지의 여비도 문제였지만 한시라도 대통령 곁을 떠날수 없는 상황이라 엄두를 못냈던 것이다(「프」여사의 회고).

<남편곁 떠날수없어>
8월8일.
지난 며칠간은 일기를 쓸 경황이 아니었다.
한국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려는 미군들의 작전에 협조하기위해 철수해야만 했다.
해병대는 진주근방에서 2일간 작전을 수행했다. 미군들은 다음날 진주에 도착할수 있다고 공언했으나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도 전투중에 있다.
어젯밤 약2천명의 적군이 낙동강을 넘어 24연대가 있는 창령까지 진출했다. 「처치」장군이 그곳에 있었으나 자신의 위치를 방어하지 못했다.
아침에 국방장관이 왔다. 전반적인 전황은 별로 좋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군들은 적을 교란시키기 위해 아무곳에서나 진격을 하는걸 꺼렸기 때문이다. 미군들은 오히려 적이 공세를 취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편이었다.
이처럼 소극적으로만 나가다가는 모든 방어선을 잃어버릴지 모를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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