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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동 대표도, 학생회장도 스마트폰으로 뽑는 세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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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호 05면

23일 오전 10시. 세종시의 한 아파트에 사는 김이선(40)씨는 아이들의 아침밥을 챙겨주고 잠시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켰다. 이날은 아파트 입주자 대표를 뽑는 선거날이다. 문자메시지에서 안내한 대로 선거 사이트에 접속한 뒤 본인 인증을 마치자 후보자에 대한 정보가 나왔다. 김씨는 두 후보의 공약을 비교해본 뒤 마음에 드는 한 후보를 찍었다. 김씨는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집을 비우기가 쉽지 않은데 집 안에서 투표를 할 수 있어 편리했다”고 말했다.

생활 속의 직접민주주의, 모바일 선거

아파트 동 대표 선거 등 생활 주변의 선거에 온라인 투표 시대가 열리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개발한 ‘온라인 투표서비스(k-voting)’가 보급되면서다. 이날 열린 세종시의 한 아파트 입주자 대표 선거에선 입주민 477명이 스마트폰 등을 이용해 투표했다. 이 아파트의 이길숙 관리사무소장은 “이전에는 동 대표를 뽑을 때 집집마다 찾아가 투표를 부탁했지만 이번에는 특별한 홍보 없이도 투표율이 더 높아졌다”며 “주민들의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게 가장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는 아파트단지 관리에 관해 주민 의견을 물을 때도 온라인투표를 활용할 생각”이라고 했다.

건축사협회장 첫 직선제 실시…투표율 80%
이에 앞서 20, 21일에 열린 대한건축사협회장 선거에서도 모바일 등을 이용한 온라인 선거가 실시됐다. 지금까지는 날을 정해 대의원이 한데 모여 간선제로 회장을 뽑았다. 이번에는 모든 회원이 모바일과 PC를 이용해 투표했다. 설립 50년 만에 첫 직선제 회장이 탄생한 셈이다. 선거인 8247명 중 6634명이 참여해 80.44%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강성익 선거관리위원장은 “지금까지는 간선제로 회장을 뽑다 보니 회원 대부분이 선거에 참여하지 못해 회장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며 “선거관리 비용도 500만원 수준으로 예전보다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선관위는 2013년 KT와 손잡고 온라인 투표서비스를 개발했다. 그해 10월 대전시 동구 가양동의 한 아파트 단지 대표 선거에서 온라인 투표가 처음 실시됐다. 이후 경남 용남고등학교 학생회장 선거, 서울시 사회복지사협회장 선거 등 지금까지 141곳의 선거에 이 시스템이 사용됐다. 특히 아파트 동 대표 선거를 중심으로 온라인 선거가 빠르게 확산하는 추세다. 서울시는 올해부터 아파트 입주자 대표 선거를 온라인 투표로 하도록 의무화했다. 최근 배우 김부선씨가 제기한 아파트 난방비 비리 등의 문제를 공정한 선거를 통해 근절하자는 차원에서다.

방법은 간단하다. 선관위에 온라인 투표서비스를 신청하면 선거 홈페이지가 개설되고,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모든 유권자에게 안내 메시지가 전송된다. 유권자는 스마트폰 등을 통해 선거 홈페이지에 접속한 뒤 본인 인증을 거쳐 투표하면 된다. 선거 비용도 선거인 1인당 300원에서 최대 700원이다. 선거가 끝나는 즉시 개표 결과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개표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선거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지난 20일 열린 제3대 금융투자협회장 선거에서는 ‘지분투표’ 방식의 온라인 선거가 최초로 실시됐다. 지분투표는 1인 1표가 아닌, 선거인의 지분에 따라 투표수를 반영하는 방식이다. 이날 선거에서는 161개 회원사가 각각 한 표를 행사한 결과가 60% 반영되고, 나머지 40%는 협회비 분담률에 따라 가중치를 둬 합산했다.

21일 MBC ‘나는 가수다 시즌3’ 첫 녹화에서도 선관위의 지원을 받아 선호투표 방식의 온라인 투표가 진행됐다. 300명의 청중평가단이 스마트폰 또는 PC를 이용해 1등부터 꼴찌까지 출연 가수들의 순위를 입력했다. 기존의 종이투표 방식에서 벗어나 집계 시간을 줄이고 공정성을 높이자는 취지다.

선관위 관계자는 “공직선거가 깨끗해지려면 생활 주변의 선거부터 깨끗해져야 한다”며 “올해부터는 1인 1표의 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의 온라인 투표서비스를 지원하는 등 점차 영역을 넓혀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온라인 선거가 주목받는 이유는 또 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이용한 온라인 민주주의가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당장 실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지방자치단체의 주요 정책 결정에 대해 온라인 주민투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정치학회에 따르면 주민투표에 온라인 투표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회당 최대 2억9000만원 정도의 비용절감이 가능하다. 고선규 선거연수원 교수는 “온라인 주민투표를 활용하면 더욱 많은 사람이 간단한 방법으로 자기 지역의 현안에 대해 직접 참여할 수 있다”며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모바일 접근성 떨어지는 노인 소외될 수도
그렇다면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을 뽑을 때도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투표하는 시대는 언제쯤 올까.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당내 경선에 모바일 투표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부작용만 노출시키고 말았다. 2012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출 과정이 그랬다. 검찰 조사 결과 동일 IP(컴퓨터에 주어지는 고유의 식별번호)로 2명 이상 투표한 경우가 3654건으로 전체 투표수의 51.8%를 차지하면서 대리투표 시비가 일었다. 100명 이상 투표한 IP도 8건에 달했다. 부정선거 논란으로 당 지도부의 리더십이 무너지면서 분당 파동으로 이어졌다. 민주통합당도 2012년 대선 후보 경선에서 모바일 투표를 도입했다가 공정성을 둘러싼 잡음으로 경선 일정에 파행을 빚은 바 있다. 새누리당은 모바일 투표가 부작용이 많다는 이유로 아직 당내 선거에 도입하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 선거의 가장 큰 약점으로 부정선거의 위험성을 꼽고 있다. 투·개표 과정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왜곡돼 자칫 더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온라인 선거는 투표용지가 없고 디지털 형태로만 투표 기록이 남기 때문에 조작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 늘 존재한다. 개인의 투표 정보가 유출되는 등 비밀선거의 원칙이 깨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서울대 강원택(정치학) 교수는 “국가기관까지 해킹에 뚫리는 상황에서 온라인 투표시스템을 국가권력과 관련된 선거에 도입하는 것은 그 위험성을 고려할 때 아직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사전투표 기간을 늘리는 등 투표 여건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유권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게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치적 이해관계 역시 온라인 투표 도입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는 온라인 투표가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작용해 정치 구도를 바꿀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다. 정보 격차에 따른 참여의 불평등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모바일 투표는 자칫 노년층을 비롯해 IT 기기 사용도가 떨어지는 취약계층을 정치에서 더욱 소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도 공직선거에 온라인 투표를 도입하는 건 아직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선관위는 모바일 투표로 진행하는 정당 경선에 대해선 선거관리 위탁을 받지 않고 있다. 앞서 선관위는 2005년에 19대 총선을 목표로 온라인 투표 도입을 추진했다가 정치권의 반대로 백지화했다.

모바일 선거를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선 기술적 안정성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고선규 교수는 “대리투표와 선거 조작 가능성 등 모바일 선거가 안고 있는 문제가 기술적·제도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며 “이를 통해 공정성과 신뢰성이 담보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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