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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한방 치고받는데 … 갈등조정기구는 휴업 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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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호 15면

한의사들이 X선이나 초음파 기기를 사용하는 문제를 놓고 의사들과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정부가 그간 금지해 왔던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규제 완화 기요틴(단두대) 과제로 선정한 게 계기가 됐다. 정부는 올 상반기 허용 범위를 결정할 예정이지만 연초부터 직능단체인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와 대한의사협회(의협)의 대립이 시작됐다. 한의사들은 “의료기기 사용은 당연한 권리인데 그동안 비정상적으로 의사들이 독점해 왔다”고 주장한다. 반면 의사들은 “한의사에게 현대 의료기기를 허용하면 오진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기요틴 대응 태스크포스(TFT)팀을 구성하고 추무진 의협회장이 지난 20일부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배배 꼬인 한의사 X선·초음파기기 허용 갈등

한의학·의학 간 갈등은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으로 이원화된 의료체계를 갖고 있는 한국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 이런 구조를 운영 중인 나라는 한국·중국(중의)·북한(고려의) 정도다. 현대의학의 공백과 한계를 한방으로 메우는 양·한방 협진처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특히 두 분야가 협력하면 의료 발전과 국민 편익 증진에도 기여할 수 있어 ‘갈등 종합판’ 성격의 기요틴 과제 향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어떤 결론 나도 양측 수긍 쉽지 않을 듯
한의협과 의협은 모두 ‘국민 건강’을 내세운다. 한의사들은 X선과 초음파 기기를 허용해야 1차 의료기관으로서 국민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필건 한의협회장은 “한의사들이 양의사 영역을 침범하겠다는 게 아니라 병을 정확히 진단해 국민 건강에 도움을 주자는 것”이라며 “발목을 다쳐 한의원을 찾은 환자를 X선 촬영으로 정확히 진단한 다음 치료를 하는 게 국민 건강에 득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X선이나 초음파 기기는 과학기술의 산물이지 양의사의 전유물이 아니다”며 “우려하는 것처럼 자기공명영상촬영(MRI)이나 컴퓨터단층촬영(CT) 같은 전문적인 의료기기를 허용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학계에서는 한의사들의 의료기기 사용 능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의협 한방대책특별위원회 조정훈 위원은 “한의사들의 전문 영역이 아니어서 의료기기 판독 능력에 문제가 있다”며 “X선으로 골절을 진단하면 정형외과로 보내야 할 텐데 이런 장비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양·한방 복수 면허를 소지한 한 대학병원 교수는 “건강기능 식품 시장이 커지면서 한방 영역이 줄어들자 위기 돌파를 위해 현대 의료기기 사용 허용을 들고 나온 것인데 그렇게 하면 오히려 한방의 정통성이 퇴색할 것”이라고 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사실상 X선·초음파 허용 불허로 가닥을 잡았다. 문형표 장관은 지난 21일 대통령 업무보고 사전 브리핑에서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허용 여부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판례가 제시돼 있다”고 밝혔다. 권덕철 보건의료정책실장도 “X선이나 초음파 기기를 허용하기 위해 법령을 바꿀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헌재는 2013년 12월 한의사의 안압측정기 사용에 대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안압측정기 같은 의료기기는 측정 결과가 자동으로 추출된다”며 “신체에 아무런 위해를 발생시키지 않는 데다 측정 결과를 한의사가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헌재는 같은 해 2월 한의사의 초음파 기기 사용 금지는 과잉금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2011년 5월 X선 골밀도 측정기를 사용한 한의사에게 “의료체계 이원성과 면허 범위를 고려할 때 한의사의 해당 장치 이용은 면허 범위 밖 의료 행위”라며 50만원의 벌금을 선고했다. 결국 판례를 종합해보면 한의사 의료기기 허용 범위는 판독이나 감별을 별도로 하는 진단 기기보다는 헌재가 제시한 ‘자동으로 측정 결과가 추출되는 기기’ 정도가 유력할 전망이다.

“전문영역 다툼은 난제 … 직능발전위 재가동을”
양측 간 갈등 문제를 푸는 것은 간단한 일은 아니다. 정부가 입장을 정리해도 한쪽, 또는 양측 모두 수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부가 한의학에 X선과 초음파 기기 사용을 불허하는 대신 다른 의료기기를 허용할 경우도 마찬가지다. 벌써부터 한의협은 “복지부가 X선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의사협회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의협 관계자는 “안압측정기를 포함해 어떤 현대 의료기기도 한의사들이 사용하는 것은 양측 갈등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사회적 타협을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현재 그런 역할을 할 기구가 없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2년 11월 당시 임채민 복지부 장관은 보건의료직능발전위원회(직능위)를 발족했으나 1년 만에 활동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의사-한의사, 의사-치과의사, 의사-약사 등 다양한 직능 간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보건의료전문가·법조인·언론계·소비자단체 대표 등 7인의 공익위원, 7인의 보건의료직능단체 추천위원과 위원장을 포함해 15명으로 구성됐다.

직능위 활동이 1년 만에 멈춘 것은 정권이 바뀌면서 직능 갈등이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당시 직능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원격의료와 비급여 개선책 등에 매몰되면서 직능 갈등 해결에 신경을 덜 쓰게 됐다”며 “전문 영역이 세분화되면서 갈등이 더 증폭되는 상황에서 활동이 중단돼 아쉽다”고 말했다. 직능위원이었던 사공진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의료 전문 영역 간 다툼은 이해관계가 첨예해 당사자 간에 문제를 쉽게 풀기 어렵다”며 “양측 간 협력 빅딜을 성사시키려면 직능위를 다시 구성해 가동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사공 교수는 당시 직능위의 성과를 예로 들었다. 의약 분업(2000년) 이후 13년간 유명무실했던 병·의원 처방전 두 장 발행 조항을 실효성 있게 다듬은 것이 대표적이다. 두 장의 처방전은 환자 알 권리 차원에서 만든 제도다. 하지만 일부 의사가 ‘발행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처방권에 대한 간섭’이라는 이유를 들어 관행적으로 한 장만 발행했었다. 환자로선 약국에 처방전을 주고 나면 어떤 약을 처방받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직능위는 ‘환자가 처방전 두 장 발급을 요구했을 때’라는 단서를 달고, 이를 거절하면 과태료를 부과하는 중재안을 만들었다. 이후 두 장의 처방전이 일반화됐다는 설명이다.

장주영 기자 jy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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