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5. 불꽃을 따라서 <25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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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원두가 대본을 아래로 내린 그녀의 얼굴을 향하여 먹물을 쏘았고 말끔한 얼굴과 원피스에 검은 물이 그야말로 처참하게 흘러내렸다고 한은 증언했다. 원두가 느닷없이 쏘고 뛰어나가고를 거의 동시에 했기 때문에 뒤미쳐 달아난 한은 거의 추격자들에게 잡힐 뻔했다고. 그런 김원두와 관련된 기억이 내게도 있다. 월남 가서 바탄간 작전에 동원되었다가 본부로 돌아오니 우편물이 잔뜩 쌓여 있었다. 거기에는 결혼한다는 여자 친구의 편지에서부터 단체로 구독하는 신문도 보였다. 어느 일간지를 펼치니 당시로서는 대대적 광고가 아랫면 5단 통자 광고였는데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한국 문단 반세기 만에 드디어 등장한 천재작가

시+소설=시설

아, 끔찍하게 아름다운 산문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째려보는 사진은 분명히 김원두였다. 나중에 진상이 밝혀지기를 포항에 그의 모친이 늘그막까지 여관을 했는데 작고하면서 그들 형제 앞으로 물려주었다는 것이다. 그의 형은 일찍이 미국 가서 성공한 실업가로 거부인 처지에 오막살이 여관에 신경쓸 일이 없었고 결국은 그가 처분을 해버렸다고. 그래서 평생에 큰 맘 먹고 자비 출판에 일간지 통단 광고까지 결행을 한 거였다.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전 아무개에게 들으니 초판은커녕 거의 팔리지 않은 거나 다름없었다고. 제목이 '아무도 없었던 여름'이었다던가. 그야말로 한창 무더위에 모두들 피서지로 시골로 가버린 서울에 백수들 모이던 다방에는 파리 몇 마리와 전과 김뿐이었다. 김과 전은 겨우 찻값이나 내고 죽치고 앉아 쓴 담배만 빨고 있었는데 원두가 불쑥 그랬다고 한다.

-전형 우리 오늘 큰돈 한번 벌어보지 않을라우?

-무슨 일인데?

-하여튼 돈벼락이 쏟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그래서 신촌 어름으로 따라가 보았더니 철로 연변의 다 찌그러진 창고 안에 책이 그야말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가 인근에서 리어카를 빌려다가 책을 가득 싣고 신촌 여대 앞의 육교 아래로 가서 좌판을 벌였다고. 전은 그가 시키는 대로 나팔을 불어야 했다.

-자아, 저자 직접 판매의 인기 소설책. 정가의 오십 프로에 드립니다.

김원두는 방학 핑계를 대며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행인의 질이 낮아 팔리지 않았다지만, 전씨의 말에 의하면 픽픽 웃으며 지나가는 것들이 모두 젊은 학생 차림이었단다. 김원두의 여러 기행은 그 뒤에도 김승옥이 목격한 얘기도 있지만 그만 줄이자. 하여튼 김지하는 그를 따라서 이만희와 함께 흑산도에서 홍어 먹으며 겨울이 가기를 기다렸는데 곧 이어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긴급조치 4호가 떨어진다. 이만희는 우리보다 훨씬 선배였지만 소탈하고 얘기하기를 좋아해서 후배들과 잘 어울렸다. 모처럼 벼르던 나의 '삼포가는 길'의 감독을 맡았는데 역시 복잡한 가정사로 마음고생이 심할 때였다. 촬영 막바지에 삼분지 일쯤 남겨놓고 간경화로 쓰러졌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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