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음악에 맞춰 소설 낭독 나는 항상 새롭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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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호 06면

“정말인지 확인 좀 해봐요.”
“왜, 한국에 할리우드 배우 오는 거 처음 봐요?”
“아니, 예술의전당에 온다잖아. 그것도 국내 오케스트라랑 같이.”
“그럴 수도 있지 뭘.”
“말코비치잖아, 존 말코비치! 기자가 궁금하지도 않아요?”

예술의전당 무대에 선 배우 존 말코비치

그래서 수화기를 들었다. “진짜 한국에 오나? 왜?” 존 말코비치(62)는 이달 초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전화를 받았다. 대답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국에 가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오케스트라와 공연하러. 클래식 음악가들과 작업하는 게 흥미로우니까. 이게 다다.”

말코비치는 진짜로 왔다. 14일 예술의전당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새 이름 코리안챔버오케스트라)과 함께 슈니트케의 피아노 협주곡을 재구성해 무대에 섰다. 그는 내레이션을 맡았다. 읽은 글은 남미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의 ‘장님에 대한 보고서’. 소설 『영웅들과 무덤에 관해』 중 세 번째 챕터다. 슈니트케의 음악에 맞춰 소설을 낭독한 것이다.

슈니트케의 피아노 협주곡은 1979년에 나왔다. 하지만 사바토의 글을 붙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디어는 말코비치가 냈다. 함께 무대에 선 피아니스트 크세니아 코간이 “슈니트케에 내레이션을 붙여보자”고 제안하자 말코비치가 사바토를 떠올린 것이다. 말코비치는 “강렬한 음악과 편집증적인 텍스트가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복잡한 20세기 현대음악과 텍스트를 알맞게 조합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무대에 섰다. “내 이름은 페르난도 비달 올모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화자는 눈 먼 이들을 연구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광기를 발산한다. 말코비치의 차가운 표정은 30분 내내 그대로였다. 그러나 긴장감은 저 혼자 커져갔다. 화자 올모스는 눈 먼 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게 됐다. 그는 방문에 큰 팻말을 걸었다. ‘나를 믿으라!’고. 올모스의 편집증이 거세질수록 음악도 거칠어졌다. 말코비치는 음악의 결에 따라 낭독을 변화시켰다. 손에는 악보 대신 텍스트만 적힌 종이를 들었지만 피아노ㆍ오케스트라의 음악에 낭독을 정확히 맞췄다.

공연을 앞두고 한국 기자들과 만난 그는 “음악 작업은 강렬하고 흥미로운 일이다. 연극ㆍ영화와는 다른 의미에서 인생에 큰 경험”이라고 말했다. 연극으로 시작해 영화에서 악역의 대명사가 된 말코비치는 2008년 이후 신작 오페라 두 편에도 출연했다. 무대에서 모차르트 아리아도 부른 적이 있다. “이번이 6~7번째쯤 되는 클래식 무대 출연”이라고 했다.

99년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말코비치는 ‘유명한 배우’의 대명사로 등장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패션 디자인도 한다. 브랜드 두 개를 갖고 있으며 다음 달쯤 새로운 브랜드를 하나 더 시작한다고 했다. 포르투갈에서는 나이트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경영이나 마케팅에는 도무지 소질이 없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기 전 청중에게 박수를 삼가달라고 부탁했다. 할리우드 배우의 첫 내한에 촉각을 곤두세운 청중을 무심히 바라봤다. 말코비치는 이렇게 새로운 장르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다. 트레이드 마크인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글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사진 서울바로크합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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