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관객 앞에서 '적군' 격퇴 장면 연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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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웃어라’편에 등장한 남녀 어린이 2000여 명의 매스게임. 깜찍한 율동과 함께 익살스러운 물놀이 장면을 담은 카드섹션으로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평양=이영종 기자

서 있는 군인과 쓰러진 군인들. 모두 인민군복을 입고 무술시범을 보였다. 인민군으로 위장한 적군과의 육박전에서 북측이 승리했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중앙일보는 평양에서 펼쳐지고 있는 아리랑 공연과 10일 노동당 창건 60주년을 앞둔 북한의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정치부 이영종 기자를 현지에 파견했다. 북한 당국의 공식 초청을 받아 3일 방북한 이 기자는 아리랑 공연을 직접 관람한 뒤 참관기와 함께 생생한 현지 르포를 보내왔다. 이 기자는 2002년 5월에도 아리랑 공연을 남한 언론사 기자로는 가장 먼저 보도한 바 있다.

평양은 아리랑 열풍에 휩싸여 있다. 공항과 양각도 호텔로비.식당에서 만난 북녘 사람들은 온통 아리랑 얘기였다. '안 보면 평생을 후회하신다''어서 오시라 평양으로'라는 포스터가 나붙었고 아리랑 기념품 특별매대(판매소)가 곳곳에 등장했다. 연인원 10만 명이 등장해 평양 능라도 5월1일 경기장에서 펼치는 아리랑 공연 때문이다.

3일 오후 8시 5월1일 경기장. 20여 대의 버스에서 물 밀듯이 내린 남한 단체 관광객들을 북한 판매원들이 맞았다. 2달러짜리 공연 팸플릿을 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공연 DVD와 VTR테이프도 15달러 안팎에 팔렸다. 경기장 앞 광장에는 대동강 생맥주와 고기겹빵(햄버거).피자 등을 파는 야시장 형태의 매대가 30여 개나 설치됐다. 그렇지만 이곳에는 남한 관광객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 북한 국제관광여행사 안내원을 따라나선 중국 관광객들 수백 명도 눈에 띄었다.

대낮같이 불을 밝힌 관람석으로 들어서던 남한 관광객 사이에서는'어, 이거 장난이 아니네''정말 대단하구먼'하는 감탄이 터져나왔다. 15만 명을 수용한다는 관람석 맞은편 스탠드에서 2만 명의 13~14세 학생들이 펼치는 카드섹션이 벌어졌다. 함성을 질러가며 형형색색의 카드를 바꿔가는 모습에 남측 손님들은 한반도기를 흔들며 환호했다. 북측 안내원 장철군씨는 "2만 명 학생이 5월 중순부터 오전 공부만 마치고 밤 늦게까지 연습해 만든 예술작품"이라며 자랑했다. 600여 명의 남한 관광객은 대부분 150달러(16만원)를 받는 1등석에 앉았고, 양 옆과 2층은 주민들로 채워졌다. 여성 안내원 최수경씨는 "매일 600~700명의 남측 관광객이 오시기 때문이 지내(매우) 바쁘다"고 말했다. 하루 저녁에 남쪽으로부터만 9만 달러 정도를 입장료로 챙기는 셈이다.

광복 60주년에 맞춰 8월 16일 시작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답게 아리랑은 웅장한 스케일과 일사불란함으로 관중을 압도했다. 특히 외국 관광객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장 중 '활짝 웃어라'편에 등장한 8살 안팎의 2000여 명 남녀 아이들은 고무튜브.줄넘기 등을 이용해 곡예 수준의 율동을 선보여 갈채를 받았다.

'풀과 고기를 바꾸자(염소 사육)' 등 농축산업과 '21세기 정보산업 시대'를 강조하는 카드섹션도 등장했다. 특히 '과학기술'이란 글자와 함께 장거리 미사일과 인공위성 그림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4장 통일아리랑에서는 1000여 명 무용수가 한반도 형상을 만들고 카드섹션에 부산~신의주 간 열차 모습이 나오자 우렁찬 박수가 터졌다.

그렇지만 공연 곳곳에 체제 찬양과 김일성.김정일 부자 우상화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수령님 그리움으로 사무치는 이 산하' 등 문구가 빈번히 등장했다. 아이들 공연도 '아버지 장군님 고맙습니다'라는 카드섹션과 아우성으로 맺어졌다.

특히 2장 선군 아리랑의 '인민의 군대'에는 북한군 3000여 명의 총검술과 격술(격투기) 장면이 선보였다. 대검을 꽂은 총을 일사불란하게 휘두르며 떠나갈 듯 악을 써대자 남한 관광객들은 섬뜩해 하는 분위기였다. 3명의 북한군이 한국군 구형 전투복 차림의 가상 '적군' 30여 명을 때려눕히는 격술 시범도 보였다. 북측 관계자는 "모두가 진짜 조선인민군인들"이라고 귀띔했다. 3년 전 첫 아리랑 공연 때 정부 판단에 따라 남측 방문객의 공연 관람을 사실상 불허하는 결정적 이유가 됐던 문제 장면이다. 정부는 이번엔 별다른 제한을 안 했다.

1시간20분간의 공연은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아 그 이름 빛나는 김일성 장군'이란 김일성 장군의 노래로 막을 내렸다. 상당수 남측 관광객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일부는 어정쩡해하거나 서둘러 자리를 떴다. 반응은 갈렸다. "북한만이 할 수 있는 정말 대단한 공연"이란 평가와 함께 "살아있는 반공교육" "동원된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아리랑 공연에는 정선아리랑이나 밀양아리랑은 없었다. 북한식으로 재해석한 선군(先軍)아리랑과 통일아리랑, 강성부흥 아리랑이 대신했다. 북한은 아리랑 공연을 통해 체제를 과시하고 내부결속을 다지려는 생각인 듯했다. 그렇지만 강성대국과 지상낙원을 노래한 아리랑 공연은 현재의 북한 모습이 아닌 그들의 염원을 담은 미래형으로 보였다.

평양=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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