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동주 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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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최영. 역사에 가정이 있을수 없다지만 그의 요동정벌은 6백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레의 미련으로 가슴을 친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아니었다면, 최영의 이상주의가 승리를 했다면, 세계의 역사는 바꿔었을것을. 그러나 그것이 어찌 흘러간 과거만이랴. 그는 아직도 우리 핏속에 살아 꿈틀거리는 혼이다.
옛고구려 땅을 찾아야한다고 북벌을 처음으로 행동에 옮겼던 최영은 동주최씨가 낳은 우리역사의 큰 횃불. 동주최씨는 그 기개를 정신적 기둥으로 삼고 1천여년 가통을 이어온다. 전국에 2천여가구 1만여명. 대성인 최씨중에 희성에 든다.

<전국에 만여명>
시조 최준옹은 모든 최씨의 원조인 신라 6부촌장중 하나인 소벌도리의 22세손 계양성의 증손으로 전한다. 고려 태조의 개국을 도운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 태사를 지냈다.
그의 증손 최석이 문종때 문과에 장원, 선종때 수태보문하시낭평장사를 지냈는데 동주 (지금의 철원)에 살아 관향을 간주로 했다.
동주최씨는 고려개국공신인 시조를 비롯해 여조에선 문하시중(조선조의 영의정격)2명과 평장사(정2품)7명을 배출하는등 명문으로 드날렸다. 그러나 조선조에선 최영의 집안이라는 이유로 재상은 한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최추청 (판례부사) 은 최석이 70세에 가까스로 얻은 독자인데자신은 8남2녀를 남아 동주최씨의 번성을 이루었다.
그의 아들중 최언당(평장쟁)은 벼슬을 물러난뒤 퇴역명신들끼리 기노회를 조직, 시와 술을 즐겨「지상선」이라 불리기도 했다.
또 평장사를 지낸 최선의 아들 최종준은 문하시중에까지 올랐다.
최영은 시조의 9대손으로 충숙왕 3년(1316년)충남 홍성에서 사헌부 간관을 지낸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난다.
16살때 아버지 원직이 돌아가며 아들에게 유언을 했다.
『여부견김여석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최영은 아버지의 유언처럼 명리를 초개같이 여기고 충과 의로 일생을 살았다. 당장 끼니를 이을 쌀이 없으면서도 전장에서 의 공로로 받은 상과 공신전을 부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청년장교로서 양광도(경기도)도 순문사 휘하에서 왜구를 막는데 큰공을 세워 왕의 근위대원으로 중앙에 진출하게됐고 공민왕 원년(1352년)조일신의 역모를 진압하면서 무명을 떨치기 시작한다.
이후 북쪽의 홍건적과 서해안지방을 약탈하는 잦은 왜구의 침입, 쉴새없는 반란등을 맞아 최영은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다시피 하면서도 『싸우면 이기는 장수』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게된다.

<왜구침입 막아>
홍건적은 한때 개성까지 침입, 민가에 불을 지르고 부녀자를 능욕했으며, 왜구는 수원 논산 등지까지 침략하는등 당시 고려는 끊임없는 의란에 시달렸다.
환갑 나이에 출정했던 왜구와의 홍산대첩은 최영의 용맹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전투.
나왕 2년(1376년)왜구는 공주를 거쳐 논산까지 점령했다. 고려에선 원수박인계가 전사해 왜구의 기세는 높은 반면 고려군의사기는 말이 아니였다. 누구도 왜구와 정면으로 싸우려 들지 않고 달아날 궁리만했다.
최영은 장병들을 독려하며 맨앞에서 달려나갔다. 이때 나무위에 있던 적병이 활을 쏴 그의 입술을 꿰뚫었다. 그러나 최영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활을 들어 그를 고꾸라뜨린뒤 화살을 뽑고 그대로 진격, 이에 힘을 얻은 장병들이 그의 뒤를 쫓아 대승한다.
그가 요동정벌을 계획하게된것은 39세때 장군(종3품)으로 있을때. 낙조의 길을 걷던 원의 지원군으로 명과의 전투를 치른 후부터.
명의 주원봉군대와 맞붙어 싸우면서 그들의 실력을 알았고 요동벌 일대엔 군대가 많이 배치돼 있지 않다는 약점도 탐지해 전술전략 면에서 승산을 점쳤기 때문이다.
나왕의 부마며 시중(수상격)이던 최영은 자신이 총사령관. 1군사령관에 조민수, 2군사령관에 이성계로 하는 정벌군을 편성하고1388년 대망의 출전을 한다.

<북벌의 선봉장>
최영은 이때 진두출진을 고집했으나 조정이 비게 되어 불안하다는 나왕의 만류로 남게되니 씻을 수 없는 한이 되고 만다.
친명파인 이성계는 애초부터 요동정벌에 뜻이없어 ▲소국으로 대국에 거역하는것은 있을 수 없고 ▲여름철 출진 ▲왜구가 허를 노릴 우려 ▲장마철이라는등 4개 불가항목을 들어 위화도에 머물러있다 엉뚱하게 칼을 조정으로 들이댄다. 그것은 왕위를 노리는 쿠데타였다.
최영은 이성계에 붙잡혀 참형 당하고 그와 함께 옛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민족의 염원도 조선조 5백년 땅에 묻히고 말았다. 그의 나이73세.
주월부사령관과 국방대학원장을 지낸 후손 최대명장군은 『이성계는 국토신장을 막았다는 점에서 이완용 김일성등과 맥을 같이하는 인물』이라고 말한다. 당시 동북아정세로 보아 고해가 만주를 수복했던들 훗날 만주족의 청나라 대신 한족이 동아를 지배할수도 있었으리란 지적이다.
최영은 참형 당하며 『내가 생전에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실제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대자2리 그의 묘소에는 풀이 나지 않아 붉은무덤(적분묘)로 불렸다. 지금은 조선이 망한뒤 후손들이 잔디를 입혀 보존되고있다.

<군·학계서 활약>
『최씨 앉은자리에 풀도 안 난다』는 속설은 여기서 연유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최영 이후 최문은 전국의 산야에 묻혀 숨어 지내 조선조엔 거의 빛을 보지 못했다.
육당최남선은 오랫동안 은거하던 「동최」를 다시 세상에 그 이름을 빛내게 한 근대의 거봉.
1908년11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소년」을 창간하면서 실은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우리나라 신시운동 신문학운동의 출발이다.
한말과 일제의 격동기를 살면서 그는 문학가 역사가 계몽운동가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출판사 「신문관」을 설립해 서양문물을 소개하는 많은 책자를 발행했는가 하면 한문을 덜 쓰고 한글을 많이 쓰자는 신문장운동을 벌였으며 박연암의「열하일기」등 우리의 고전을 번역해 내기도 했다.
『단군론』 『쉽고 빠른 조선역사』등 많은 역사책을 편찬 보급해 조선정신 조선주의의 민족얼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춘향전』 『심청전』등 고전소설을 값싼 「육전소설」로 출판, 부녀자들과 농촌사람들에 게 정서정화와 한글보급운동도 일으켰다.
3 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집필 작성한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신문관」해산후 다시 세운「동명사」는 도시계획에 의해 얼마전 광교에서 헐렸으나 청진동으로 옮겨 그의 아들 최한웅박사(한아재단이사장) 가 맡아 계속 이끌고 있다.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총재를 지낸 최두선씨(작고)는 최남선의 동생.
최문의 현근인물중엔 군출신과 교수가 많다. 황금을 돌같이 알라는 선조의 유지를 받들듯 재물로 일어선 사람은 별로 없다.
만주에서 항일독립운동을 벌인뒤 해방후 국군39사단장과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을 지낸 최석용준장(작고)을 비롯, 전술한 최대명예비역소장(육사5기)과 최명균(예비역공군준장), 최영석 (예비역해군대령), 최창흡 (예비역대령 성대교수)등은 선조 최영의 뜻을 이은 무인들.
교수로는 최대호(충북대)·최상흘(한대)·최정규·최창해(산업대)·최한명(이대)·최한석(고대)·최한인 (서울대)등이 있다. <글 허남진·사진 이창성 기자>
▲다음주는「거창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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