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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만들어지는 캐릭터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국제시장’(2014, 윤제균 감독)에 오달수(47)가 연기한 달구가 등장하면 객석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웃음이 터진다. 주인공 덕수(황정민)의 절친한 벗이자 부산 지역의 어설픈 패셔니스타.
그는 대사 한마디, 몸짓 하나로 관객을 쥐락펴락한다. 마냥 웃기기만 하는 건 아니다. 달구는 윤제균 감독이 처음부터 오달수를 떠올리며 든 캐릭터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속 깊은 친구에 오달수가 맞춤한 듯 어울렸기 때문이다. 오달수는 예의 그 느리고 진중한 말투로 “‘국제시장’은 내게 큰 울림을 준 영화”라고 말했다.

-극 중 달구의 젊은 시절 패션이 아주 화려하다.
“당시에 잘나간다는 사람들을 나름대로 전부 따라 하기는 했는데 어딘가 촌스러운 매력, 그게 달구다. 제임스 딘과 비슷한 의상을 입자고 했던 건 류성희 미술감독의 아이디어다. 달구는 극장 주인 아들이니 영화 매니어일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젊은 시절의 얼굴은 CG(컴퓨터그래픽)의 힘을 빌었는데.
“20대 때 사진을 참고용으로 줬는데 CG 스태프들이 엄청나게 웃었다더라. 왜지(웃음). 내가 보기엔 영화 속 CG와 실제 내 젊은 시절 얼굴이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제임스 딘 흉내를 내지 않았다는 것? 난 예나 지금이나 퍽 내성적인 사람이다.”

-황정민이 ‘젊은 시절 얼굴이 영 이상하게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오달수를 보고 한시름 놨다’는 말을 남겼다.
“사람이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면 자기 자신에게 푹 빠지게 된다. 황정민이 그렇다(웃음).”

-윤제균 감독의 이전 영화들은 재미있게 봤나.
“물론이다. ‘해운대’(2009)를 특히 좋아한다. 인간적이고 따뜻한 영화 아닌가. 남들이라면 너무 작은 부분이라며 흘려버릴 것도 윤제균 감독은 착착 눈에 들어오게 한다. 만식(설경구)이 연희(하지원)에게 고백도 못하고 가슴앓이 하며 혼자 술 마시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달구를 연기할 때 감독이 특별히 요구한 것이 있었나.
“그런 건 없었다. 시나리오에 워낙 촘촘하게 인물을 잘 그려놨더라. 내가 아주 좋아하는 대사가 있다. 동료들이 탄광에 갇힌 덕수와 달구를 구하러 왔을 때, 달구가 ‘덕수를 먼저 데려가라. 얘가 지금 말이 없다’고 한다. 굉장히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대사였다.”

-오달수 정도의 연륜이면 머리 싸매고 고민하지 않아도 캐릭터가 뚝딱 만들어질 것 같다.
“오해다(웃음). 저절로 만들어지는 캐릭터는 없다. 보통은 내가 연기할 캐릭터에 대해 300가지 정도의 질문과 답을 생각한다. 좋아하는 색까지 떠올려본다.”

-달구도 마찬가지였나.
“솔직히 300개까진 생각 못했다(웃음). 대신 관찰을 많이 했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으니, 작은아버지가 내 관찰 대상이었다. 70대인데 아직도 정정하시다. 극 중 마지막 장면이 덕수 어머님의 제삿날이잖나. 달구가 집에 찾아가면 덕수가 ‘니는 여 와 왔노?’라고 묻는다. 그때 나의 애드리브가 ‘제삿날인데 어른은 한 명 있어야지’였다. 작은아버지라면 진짜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 영화에선 아쉽게 편집됐다.”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평생을 교직에 몸담으셨다. 항상 자율을 강조하며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43년을 함께 살았던 분인지라 한마디로 정의하긴 어렵다. 단지 피는 못 속인다고, 내가 아버지와 비슷한 면이 참 많다.”

-‘국제시장’은 아버지 세대에 전하는 감사와 위로의 정서가 뚜렷하다. 동시에 때로는 그것을 호소하는 듯한 인상도 짙다.
“내 돈 내고 영화를 보는 건데, 강요받는다는 기분이 들면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제시장’이 무언가를 강요하는 영화는 아니다. 가만히 보면 덕수가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과정에 더 가깝다. 덕수의 입장에서 보면 자연스레 연민이 인다. 그의 쓸쓸함이 마음에 와 닿는다면 비로소 이 영화를 가치 있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물의 인간적 매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나는 내 안에 있는 감성을 끄집어내 남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연기를 한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한번 울면 행복하고, 웃으면 더 행복하다. 인간적 연기로 누군가의 마음을 뒤흔들 때의 쾌감. 연기하는 재미는 거기에서 다 나온다.”

-한 번쯤 온전한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주연과 조연은 사람들이 말하기 편하게 정해둔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신마다 주인공은 따로 있다. 배우가 그걸 알고 있어야 작품 안에서 제대로 된 몫을 해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달구가 주인공이 되는 신이라면 댄스 파티 장면일까.
“겉으로 보면 그렇다. 무척 코믹하게 그려졌는데, 사실 그건 내가 가장 슬프다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파티가 끝날 무렵 카메라가 행복해하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는 것이 그렇게 애잔했다. 이렇게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나면 파독 광부들은 다시 지하 몇백 미터탄광으로 내려갈 테고, 간호사들은 시체를 닦으러 갈 것 아닌가.”

-바로 다음 장면은 달구와 기숙사 사감의 코믹한 러브신인데.
“너무 오버 아닌가 싶어서 다들 우려했던 장면이다. 차라리 만화라고 생각하고 찍었다. 일단 사람이 침대 위에 그렇게 내동댕이쳐지는 것 자체가 만화 같지 않나(웃음).”

-‘오달수는 웃기는 배우’로 기억되는 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난 만족한다. 개성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본다. 박찬욱 감독이 늘 강조한다. 배우의 첫 번째 조건은 개성, 두 번째 조건도 개성, 세 번째 조건은 무엇보다도 개성이라고(웃음).”

-박찬욱 감독과는 ‘올드보이’(2003)를 시작으로 인연이 각별하다. 감독의 신작에 참여하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하나.
“얼마 전에 함께 술을 마셨다. 박찬욱 감독이 ‘이번 영화(아가씨)에는 줄 만한 역할이 없어 미안하다’고 하더라. ‘걱정하지 말고 재미있게 잘 찍으시라’고 했다. 내가 보탬이 된다면 언제든 달려가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섭섭한 마음은 전혀 없다.”

-출연작 누적 관객 수가 곧 1억 명을 돌파할 것 같다. 올해도 ‘조선명탐정:사라진 놉의 딸’(2월 12일 개봉, 김석윤 감독)을 시작으로 ‘베테랑’(상반기 개봉, 류승완 감독) ‘암살’(7월 개봉, 최동훈 감독)까지 줄줄이 개봉하는데.
“그게 다 나 혼자 출연한 영화도 아닌데 낯 뜨겁다. 요즘 누가 그 얘기를 꺼내면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려버린다. 그리고 대수롭지도 않다. 중국에서는 영화 한 편으로 한 방에 모을 수도 있는 숫자 아닌가(웃음).”

-새해 목표는.
“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된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을 통 못 썼더니 알아서 혼자 큰 것 같아서 미안하다.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게 올해의 목표다.”

어린 달구와 어른 달구의 만남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꼬마 달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미군들에게 “쪼꼬렛또 기브 미”를 외치며 잔망스러운 개다리춤을 추던 바로 그 어린이 말이다. 어린 달구를 연기한 아역 배우 장대웅은 올해 열한 살, 이제 어엿한 초등 고학년 학생이다. 이날 장대웅 군은 오달수를 직접 만나 인사하기 위해 인터뷰 현장에 찾아왔다.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난 것은 처음이다. 장대웅 군은 오달수와 닮아 보이기 위해 똑같은 위치에 점을 그리고 연기 오디션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묻자 쑥스러운 듯 몸을 비비 꼬며 남긴 답변은 “제가 한 것은 아니고요, 엄마가 점을 찍어주셨어요.” 오달수는 장대웅 군의 연기에 대해 “정말 깜찍하게 잘해서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물론 어릴 때 나는 훨씬 잘생겼었다(웃음). 믿을 수 없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아주 귀엽고 예뻐서 동네에서 나를 쓰다듬지 않은 어른이 한 분도 없었을 정도였다!”

이은선 기자 haroo@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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