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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잘가라, 풋사랑 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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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영화 ‘사랑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과거와 현재의 시공을 연결하는 기법이 현실과 팬터지의 경계를 허문다. 아래는 농촌청년과 다방아가씨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영화 ‘너는 내 운명’.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곧잘 되묻지만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말도 기억하시는지. 올 가을 차례로 선보이는 멜로영화의 경향은 후자로 대변된다. 지난해 봇물을 이뤘던 10대 위주의 사랑 얘기가 사라진 대신 이제 사랑의 무게중심은 완연히 어른들로 옮겨졌다. 영화적 표현 역시 저마다 다양한 개성을 자랑한다.

# 어른들의 사랑이 온다

우선 주인공이 나이 들고 성숙해졌다. 단적인 예로 지난주 개봉 이후 110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한 '너는 내 운명'(감독 박진표)을 보자. 주인공 석중(황정민)은 로맨스의 통념에 어울릴 성싶지 않은 36세 농촌청년이고, 티켓다방 아가씨 은하(전도연) 역시 사랑의 쓴맛 단맛을 익히 본 과거가 있다. 애초 17세 소년과의 사랑이라는 점이 화제를 모았던 '사랑니'(감독 정지우.29일 개봉) 역시 시사회에서 드러난 모습은 30세 여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감독 민규동.10월 7일 개봉)은 아예 중년 남녀, 이혼녀.노총각, 신혼 부부 등 세대를 넘나들며 일곱 쌍의 사랑을 스펙트럼처럼 펼쳐보인다.

이는 지난해 '내 사랑 싸가지''늑대의 유혹''그놈은 멋있었다''어린 신부'등 연달아 예닐곱 편의 영화가 10대~20대 초반 눈높이에서 사랑 얘기를 쏟아냈던 것과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인터넷 소설이 원작인 '동갑내기 과외하기'(2003년)의 흥행 성공이 촉발시킨 이런 붐은 올해 초 '제니 주노'를 고비로 점차 자취를 감췄다. LJ필름 박인앙 기획실장은 "인터넷 원작 영화들이 붐을 이룰 무렵 준비하던 영화들이 이제 차례로 선보이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10대 관객을 겨냥해 양산된 기획영화에 대한 충무로의 반작용이라는 얘기다.

#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나이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씨가 "단연 올해의 발견"이라고 꼽는 '사랑니'는 영화의 형식 역시 독특하다. 학원강사인 주인공 인영(김정은)은 자신의 첫사랑과 이름도, 생김새도 똑같다고 생각한 수강생 석(이태성)에 마음이 설렌다. 이런 장면은 주인공의 10대 시절로 보이는 인영(정유미)의 첫사랑 사연과 교차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10대 소녀 인영과 30대 여성 인영이 같은 시공간에 등장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런 트릭은 관객을 당혹시키기도 하지만, 영화 전체가 실제 벌어진 사건과는 별개로 인영의 주관적 시점을 섬세하게 좇아왔음을 보여준다. 정지우 감독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감정을 소중하고 성실하게 감당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영화의 출발점"이라면서 "사랑이라는 소재는 아마 수백만 번은 영화로 만들어졌겠지만, 이를 새로운 형식과 감수성으로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하면 '너는 내 운명'은 언뜻 대척점에 서있는 듯 보인다. '통속 사랑극'을 자처하는 이 영화는 티켓다방 아가씨를 향한 농촌청년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야말로 통속적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련된 감성을 추구해 온 최근의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이 통속성이야말로 오히려 이 영화를 새롭게 보게 한다. 영화는 에이즈에 감염되는 여주인공의 불행과 월드컵 열기를 대비시키는 식으로 현재형의 사회문제를 거론하는 한편 다단계의 극적인 장치를 통해 드라마의 흐름에 힘을 싣는다. 박진표 감독은 "쉽게 말하지 못하고, 행동하지 못하지만 결국 우리 누구나 마음속에 있는 것이 통속성"이라고 말한다.

# 세상은 넓고 사랑은 많다

다채로운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내 생애…'이 돋보인다. 일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처지가 다양한 남녀 14명의 사랑을 씨실과 날실로 교차하는 쉽지 않은 형식을 전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세 편 모두 한국영화의 평균제작비를 넘지 않는 30억원 이하의 예산에, 각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젊은 감독들의 '대작'이 아닌, 즉 특수효과나 초대형 세트가 아니라 극적 구성과 배우의 연기가 주재료인 영화들이다. '너는 내 운명'의 전도연.황정민은 물론이고, '사랑니'의 김정은 역시 최근 실추된 이미지와 별개로 성숙한 연기를 보여준다.

이처럼 서로 다른 개성의 세 영화는 사랑이라는 흔하디 흔한 소재가 얼마나 다채롭게 변주될 수 있는지를 확인시킨다. 사실 신인급 감독들의 사랑 변주곡은 이제 첫 소절이 시작됐을 따름이다. '소년, 천국에 가다'(윤태용 감독),'러브 토크'(이윤기 감독),'새드무비'(권종관 감독)가 각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관객과 만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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