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20>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순경은 씨부렁거리면서도 그동안 대위와 대판 싸우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면서 서로 간에 인간적인 이해가 생긴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감방에서 말하는 왈왈구찌가 대위인 셈이다. 박 순경이 상의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아예 두 대를 물더니 지포 라이터로 동시에 불을 붙여서는 창살 사이로 들이밀며 말했다.

-이거 하나씩 때리고 빨리 해골 굴려. 시방 몇 시인 줄이나 알아?

-야 근데 그 지갑 좀 갖다 달라니까.

대위의 재촉에 순경은 짜증을 냈다.

-줄수록 양양이라구 되게 못살게 구네 개새끼.

-너 이 새끼 머리 가마에 쇠똥두 안 떨어진 새끼가 형님보구 뭐라구?

-아 지갑은 왜 달래…. 그거 규정 위반이잖아?

대위가 진지하게 사정 조로 나오는 것은 나도 그때 처음 보았다.

-박 순경님, 지갑에 내 옛날 애인 사진 있다. 얘가 보여 달라구 해서 그래. 옛 생각두 나구 말야.

알았어, 순순하게 대꾸하더니 감방 근무자가 그의 지갑을 찾아 가지고 돌아왔다. 예전 지갑은 뱀 가죽 지갑이라고 시곗줄 비슷한 비닐로 만들고 시민증 넣는 칸도 있었다.

-다 보구 나면 창살 밖으로 내놔. 다시 제자리에 넣어 놔야 해.

박 순경이 중얼거리며 돌아가자 대위는 안쪽 깊숙한 곳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우리는 담배를 태우며 사진 감상을 했다. 그 옛날 악극단 무대 장치처럼 달이 희부염 하니 떠 있고 앞에는 무슨 난간인지 계단인지 나뭇가지가 늘어진 가운데, 위에는 한복 저고리에 예전에 유행하던 비로도 몽당치마 아래로 발목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을 신고, 양 갈래 머리를 땋은 소녀가 '방긋 웃으며' 서 있었다. 사진 아래편에 휘갈긴 하얀 글씨가 '추억은 영원히!' 라고 찍혀 있었다. 사진은 적당히 누렇게 퇴색하기 시작했다.

-와 이쁜데요. 이분이 옛날 애인이라구요, 지금은 어떻게 됐는데?

나의 너스레에 대위가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결말에 천박하고 성급해서 무슨 소설을 짓는다구 그러느냐. 네 생각은 어떠한고?

-첫사랑은 비극으루 끝난다던데….

-첫사랑 아냔 마. 어떻게 됐는고 하니 우리 마누라가 되었다. 그래서 신세 조진 사나이다.

결말이 싱거워서 나도 좀 김이 샜다. 그러니까 어째서 견딜 만한 직업군인을 그만 두었느냐 하니까 그 대답이 이 여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여자 말이 고향에 전답이 좀 있는데 오빠가 대대적으로 양계장을 한다고 그랬다. 그래서 일손이 부족하여 가서 도와주면서 고향 땅을 누가 떼어가는 것도 아니니 빌려서 병아리 분양받아 우리도 대대적인 양계장을 하자, 뭐 그런 얘기였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