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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한제국의 최후(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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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의 한국 병합 공작에 항쟁한 안중근 의사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그는 을사조약을 강요했던 [이또]를 저격함으로써 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시위했다. 그는 일본법정을 거부하고 의병 중장으로서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최근 몇 사람의 일본인이 안 의사에 대한 일본의 재판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연유의 하나도 여기에 근거해 있다.
그런데도 안 의사의 의병활동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민족운동은 진남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삼흥 학교와 돈의 학교를 세웠었다. 그랬지만 계몽교육의 한계를 깨닫고 l907년 러시아로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 영이던 연해주에는 10여만 명의 한국인들이 살고있는 독립운동의 기지였다. 현지의 독립운동은 두 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나는 이범윤·최재형 중심의 무장항일 노선으로 노우키에프스크파였고 다른 하나는 해조신문의 창설자 최봉준의 계몽파였다. 안중근이 의병파에 참여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의병파는 1908년 4월 이범윤을 총 대장으로 하여 국내 진공작전에 돌입했다.
갑부였던 최재형과 현지 교포의 지원을 합쳐 30만원의 자금으로 훈련한 2천 명 선의 병력이었다. 이들은 1백 명 정도의 소부대로 나누어 국내에 진입, 갑산· 무산 등지에 집결, 무력항쟁의 기지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정보는 일본에 사전 탐지되었다. 당시의 일본영사 경찰의 정보보고서가 이를 입증하고있다.
『이범윤 부대는 소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국경을 넘은 뒤 갑산· 혜산진·무산 3개소에 집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들 폭도들은 집결부대가 8백 명 선에 이르면 국내 각처의 폭도와 연락하여 활동을 개시할 계획이다. 이들은 다수의 토벌부대와는 충돌을 피하고 소수의 군대·헌병· 경찰관의 주둔지역을 기습하여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있다.』

<의병 3개소 집결>
의병부대의 진공작전은 2개월만에 실패로 끝났다. 정보가 사전에 누설돼 침투루트가 알려진데다 자체의 훈련이나 지휘계통이 산만했고 기대했던 국내 의병의 호응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이 작전에서 전제덕 부대의 우군령장(일명 우군중장)으로 50명의 소부대를 지휘했다. 이때 좌군령장은 엄인섭이었다.
이들 부대는 1908년 7월 본부에서 40리 떨어진 사티노촌을 출발했다. 두만강을 건너 경흥군에 당도했을때 4명의 일본군 척후병과 마주쳤다. 안은 이들을 사살하면 경계가 강화된다고 말렸으나 좌군의 엄인섭은 충고를 듣지 않고 사살해버렸다. 염려했던 대로 얼마 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무산으로 이동 중 회령지방에서 총 대장 이범윤 부대의 김 부장이 이끄는 부대와 만나 두 부대를 통합했다.
그런데 통합부대의 지휘권을 놓고 전과 김이 대립해 내분이 일어났고, 미처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아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안중근은 이 전투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단신 노우키에프스크로 돌아왔다.
의병파의 국내진공작전 실패는 계몽파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무역상으로 이 지역 교민 중 최대 갑부로 계몽파를 이끌고 있던 최봉준은 l909년 6월 12일 현지 교민의 한 집회에서 연설하면서 『의병파는 의병을 자칭한 폭도에 지나지 않는다. 작년부터 군자금이라 하여 거액의 돈을 거두어 갔지만 국가의 행복을 증진한 것이 무엇이냐』고 몰아쳤고 의병파는 그런 최봉준을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본 첩자로 규정, 자택을 습격하기까지 했다.
안중근은 파쟁에 섞이지 않고 대동공보의 노우키에프스크 탐방원으로 일하면서 별도의 무력항쟁을 계획했다. 1909년 봄 그는 김기열· 백락길 등 12명의 동지와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단지동맹이란 왼손 무명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 혈서하고 [이또] 등 침략의 수괴와 한일협약에 조인한 한국 대신들을 살해해 의병활동의 기초를 만드는데 목숨을 바친다는 비밀결사였다.
1909년 8월 [이또]의 만주 방문이 알려지자 안중근은 거사를 계획했다. 유동하는 장춘, 우덕순·조도선은 채가구, 안중근은 하얼삔에서 [이또]를 대기했다.

<정보누설로 실패>
장춘 등지는 [이또]가 지나가기는 했지만 열차에서 내리지 않아 거사를 결행치 못했고 결국 하얼삔에서 안 의사가 총격에 성공했다.
안중근의 [이또] 총격을 일본은 병합 촉진의 구실로 이용했다. 통감부문서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있다.
『[이또] 암살은 폭풍과 같은 일본 국민의 분노를 일게 했다. [이또] 복수를 부르짖으면서 한국을 병합해 일본의 한 현으로 만들고 대한 황제는 천황에게 사과하도록 해야한다는 것이 들끓는 여론이었다.』
의거는 민중의 항일 의지를 일깨웠다. 그러나 황실은 정반대였다.
태 황제 고종은 사과사절을 일본과 대련으로 보내고 [이또]에게 문충이란 시호를 내렸고 일본에 나가있던 황태자 영친왕에게 3개월간 상복의 예를 갖추라고 했다.
심지어 백성에 대해서도 [이또]의 국장까지 가무음곡을 금했다.
내각도 재정이 어려웠음에도 13만원이란 조위금을 마련, 이완용을 조문사절로 도오꾜에 보내 3만원은 [이또] 장례비로, 10만원은 [이또] 유족에게 전달토록 했다. 이것은 망국을 예고한 지배층의 무기력이고 비굴함이었다.
상해에서 발행되던 청국의 민호일보는 사설을 통해 대한제국의 위기를 예고했다.
『[이또]가 죽었다해서 일본의 침략정책이 완화되지 않음을 알아야한다. 세인은 [이또]가 침략의 수범이라 보고 있지만 [이또]는 온건파의 거두였다. [이또]의 죽음은 수상 [가쓰라]의 강경파 강화로 나타나 청국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보다 급진적으로 실행될 것이다.』
마치 안중근의 [이또] 살해가 합병을 촉진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그런 것은 아니다. 이때는 군대 ·경찰· 사법권 등 내정까지도 일본이 뺏어갔고 병합방침도 일본 각의를 통과한 때였다.
주목할 일은 [이또]의 만주 여행목적이다. 일본 정부는 [이또]의 만주방문은 개인자격의 여행이며 정치적 사명은 없다고 했다. 그랬지만 그에겐 두 가지 밀명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병합에 대해 러시아 대장상 [코코프체프]의 양해를 얻어달라는 수상 [가쓰라]의 비밀청탁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목표는 일본의 대륙진출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려는 [이또] 구상이다. 오랫동안 베일에 싸였던 [이또]의 원대한 꿈을 살펴보자.
[이또]는 1907년 봄 한국통감으로 있을 때 남만주 철도회사 총재 [고또](후등신평 뒷날 [데라우찌] 내각에서 외상을 맡게 됨)와 만나 꼬박 3일간 대륙진출을 토론한 일이 있다. [고또]는 3일간의 밀담을 그의 비망록 속에 남기고 있다.

<영친왕, 상복 입혀>
그 핵심만 옮겨보자.
▲고또=각하의 급무는 청국과 러시아에 대한 근본대책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 일은 일대의 중망을 모으고 있는 각하 외에는 적임자가 없습니다. 각하의 뜻이 있다면 불초 힘을 다해 돕고 싶습니다.
▲이또=(고또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모호한 답변.)
▲고모=각하, 대외정책을 위해 우선 한국통감 자리를 내놓고 경세가의 자격으로 외유, 대륙의 실력자들과 담론함이 어떻습니까.
▲이또=천황 폐하의 승인만 있으면 언제라도 통감자리를 내놓을 참이야. 실은 [소데]를 내 후계자로 추천한 일이 있네. 그렇지만 외유를 해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이등의 밀명여행>
▲고또=각하가 개인자격으로 대륙에 간다해도 누구도 개인자격으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청국의 서태후를 만나 대 아시아주의에 따라 동양인 스스로 동양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설득하면 미청동맹을 포기하고 일본과 손잡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또=대 아시아주의라는 게 뭔가. 국제정세를 모르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황화론을 부르게 돼.
▲고또=대아시아주의는 미국의 먼로주의와 같이 자위의 목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황화론의 원인이 된다면 먼로주의는 미화론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요는 오해를 사게 되는 이유는 외교의 졸렬함에 있는 것이지 주의 그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이또=대아시아주의를 동양정책으로 하면 좋아. 중국의 정치가 중에 군의 논지를 이해할 자가 있을까.
▲고또=청국의 중심세력에 동양정책을 더불어 논할 자가 없다면 제2책략이 있습니다.
▲이또=제2책이라면.
▲고또=그것은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4국과 협력해서 청국의 보전과 동양의 평화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각하가 이들 4개국 식자들과 담론하는 중에 일청 두 나라의 특수관계를 이해시켜야 합니다. 금후의 세계정세는 동양과 서양이 아니라 구대륙과 신대륙(미국)대결의 경합을 나타낼 것이므로 유럽과 아시아 두 구대륙이 공통의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또]는 [고또]의 견식을 파천황의 명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대의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 일이 있는가고 물었다. 없다고 했더니 [야마가따]에게는? [가쓰라]에게는? 라고 그의 두 정적의 이름을 들추며 재확인을 했고 [고또]는 이런 뜻을 이해할만한 분은 각하 외에는 달리 없다고 믿어 누구에게도 말한 일이 없다고 했다. [이또]는 아주 흡족한 얼굴로 우리 둘의 얘기는 일절 발설치 말라고 엄명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이또]는 [고또]와의 밀약대로 여행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로일전 승리의 대가로 여순 등의 조차권, 동청 철도의 경영권 등을 확보하고 있었고 북경조약에 따라 청국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이 우월권이 미청 동맹 움직임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청국의 미국 경사방지가 [이또] 여행의 감추어진 야망이었다.
그날 안중근은 당시로선 최신형인 브라우닝 식 8연발 단총으로 [이또]를 저격했다. [이또]를 향한 네 발의 총탄 중 세 발이 가슴에 명중했다. 그는 8발 중 7발을 쏜 뒤 러시아군 의장대 앞으로 뛰어나와 라틴어로 [코레아 후라](대한만세)를 세 번 외치고 러시아군 대위 [니키흐오르프]에게 체포됐다. [이또]는 한국인이 그를 쏘았다는 것만은 간신히 확인한 채 숨을 거두었다.
나이 69세, 안중근은 31세였다. 안중근의 재판 관할권은 당연히 러시아였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곧바로 관동도독부 여순 지방법원으로 송치해 [미조후찌](구연효웅) 검찰관에게 넘겼다.
이런 처사에 대해 대동공보는 사설로 항변했다.
『사건발생은 동청 철도 구역 안이다. 노청조약에 보면 역구내의 형사사건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가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국제관례로 보아 러시아가 재판함이 당연하다』라는 내용.

<4발 중 3발 명중>
안중근은 일본 검찰관에게 『나는 시일이 촉박하지 않았다면 독립의용군을 이끌고 하얼삔을 공격했을 것이고 자금능력이 있었다면 군함을 사서 대마해협에서 [이또]가 탄 기선을 공격했을 것이다. 나의 거사는 대한국 의용대 참모중장으로서 전투행위를 진행한 것이지 개인으로서 [이또] 개인을 암살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당시 상해에 은거해 살던 민영익은 대동공보 사장이며 변호사인 러시아인 [미하일로프]를 변호인으로 선임해보냈고 송병찬, 영국인 [더글러스]와 스페인인 변호사 등이 안중근의 변호인을 자청했으나 일본에 의해 거부당했다. 안중근의 법정심문 일부를 옮겨보자.
▲그대는 [이또]를 본 일이 있는가?
▲없다. 사진을 보았을 뿐이다.
▲어떤 특징을 알아두었나?
▲수염의 모양이다.
▲사진으로만 본 [이또]공작을 어떻게 확인했나?
▲[이또]가 도착하자 의장대 뒤에 가서 서있었는데 기차를 내려 환영단 앞을 지나서 돌아올 때 [이또]를 확인했다. 나는 후열의 변사와 변사 사이로 단총을 쏘았다.
▲그 거리는?
▲두 칸 반쯤 거리를 두고 어깨 위를 겨누어 쏘았다.
▲[이또]를 쏜 후 겨냥을 바꾸어 다시 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쏜 것이 [이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뒤따르는 신사를 쏘았다.
▲단총으로 쏠 때 머리를 겨누면 가슴에 명중한다는 사실은 그대가 연구한 것인가.
▲나는 사냥꾼으로 총을 다뤄봤다. 위 어깨를 겨누면 명중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단총은 어디서 구했나.
▲윤치종이라는 동지가 일본제일은행권 40엔을 내서 사준 것이다.
▲[이또]공작을 왜 적이라고 하는가.
▲이유는 많다. 한국 왕비를 살해한 것, 을사조약을 체결한 것, 한일협약 7개조를 강요한 것 등(15개조의 침략행위를 열거했다).
1910년 2월 14일 재판장 [마나베]는 제국형법의 살인죄를 적용,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 유동하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안중근의 모친은 『어미보다 자식이 먼저 가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 불효라는데 얽매이지 말고 대한남아로서 의로운 일을 한 의인답게 처신하라』고 했다.
그 어머니의 아들답게 안중근도 이보다 더 무거운 형벌은 없느냐는 말로 일본 법정을 무시했고 공소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사형집행 일은 3월 25일로 결정되었으나 뒤늦게야 그날이 순종 황제의 탄신일임을 알게된 일본 검찰은 한국민을 더욱 자극하리라는 우려 때문에 26일로 연기해 집행했다.
현장엔 검찰관 [미조후찌]와 전옥, 그리고 통감부 통역이 나와있었다. 유언을 듣겠다고 하자 안중근은 『달리 유언할 것은 없다. 원래 나의 거사는 동양 평화를 위한 성의에서 한 것이니 바라건대 오늘 임검한 일본 관헌도 행여 나의 작은 뜻을 알아준다면 피아의 구별 없이 합심 협력하여 동양평화를 기구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했다.
『하얼삔 공원 근처에 나를 묻어주고 대한의 독립이 회복되면 고국에 옮겨 묻어달라』는 유언을 내세워 가족들은 유해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제는 그날 하오1시 죽은지 3시간 된 시체를 감옥 안 묘지에 매장해 버렸다.

<"고국에 묻어달라">
안중근의 형 집행이 알려지자 청국의 원세개는 「안중근의사만」을 읊었다.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건 장부가 아니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만국에 이름 떨쳤소. 살아 백살이 없는건데 죽어 천년을 가오리다」(평생영사지금필 사지도생비대부 신재삼한명만국 생무백세사천추).
안중근은 옥중에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본 관리들의 부탁으로 2백여 폭의 휘호를 남겼고 담당 검찰관에게까지 서필을 주었다. 그는 사형집행 일이 결정된 직후 동포들에게 마지막 당부의 글을 띄웠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3년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느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안중근은 옥중에서 그의 자서전도 남겼다.
그에게서 특기할 일은 그의 인물 평이다. 검찰관이 한국의 지도층과의 연결을 캐묻는 질문에 답하는 가운데 그는 당시의 인물들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남겨놓았다.
그 인물 평 몇 가지.
▲이완용=망국의 거괴다.
▲최익현(한말의 유학자이자 의병장)=고명한 선비로 여러 차례 격렬한 상소를 올리고 도끼를 들고 대궐에 꿇어앉아 신의 목을 베라고 한 것은 진정으로 국가를 우려한 행동이다. 그는 백이숙제 이상의 인물이다.
▲민영환=충신이라고 말할 뿐이지만 자기 한 사람이 죽어 국가에 무슨 소용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의 죽음이 국가에 덕 입힌바 없다. 그를 혹평한다면 자기 명예를 위해 자결하였음이 아닐까.
▲이범진=불라디보스톡에선 별다른 평판이 없다. 그의 국가관은 우리와 다르다. 그는 국권을 회복해 총리대신이나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조의 재흥을 꾀하는 자다.
▲민전호=군인으로서 의병의 최후를 지키며 힘을 다한 의사로 부끄러움 없이 살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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