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제79회>육사졸업생들|숙군작업 전군확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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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제주도사건과 여순반난·대구폭동으로 군내의 좌익위협이 위험수위에 이르자 군으로서도 일대 단안을 내리저 않을수 없었다.
더구나 남북이 이념적으로 대치된 상황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내걸고 출범한 신생 독립국의 국기를 다지기 위해서도 군의 반공화는 불가피할뿐만 아니라 지상과제로 등장했다.
이래서 군은 육군총사령부 정보국장 백선엽중령 지휘아래 조사반을 구성하고 군내의 좌익조직 근절에 착수했다.
여순지구를 말은 조사반은 정보국제3과의 자철현대위가 반장이고 반원으로는 이세호 (2기) ,김창용(3기)양린석(5기)그리고 박평내·이희영등이 선발됐다.
이들은 광주에 내려가 포로가 된 반란군은 물론 생존한 토별군들을 포함한 3천명에 대해 엄중조사를 실시하여 그중 1백50명을 남노당계로 가려내어 처벌했다.
조사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김창룡대위는 남로당 군사책인 이재복의 비서겸 연락책 김영식을 서울 삼청동에서 체포했다.
그에게서는 많은 비밀서류가 압수했는데, 그 중에는 군에 침투한 좌익계 5백여명의 명당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명단에는 당시 육사 생도대장으로 있던 오일균소령, 육사교수부장 조병건소령, 중대장 김학림소령, 4여단장 참모장 김종석중령, 15연대장 최남량중령등 1백여명의 장교도 들어있었다.
김창룡대위는 김영식을 체포하고 중요서류를 압수한 공로로 대위로 진급된지 70일만인 48년11윌5일 소령으로 특진됐다.
그때까지 1연대숙군의 책임자이던 김창룡이 그후부터는 전군에 대한 숙군의 주역으로 자리를 굳히게 됐다.
김소령은 김영식을 전향시키는데 성공하여 지하에 숨은 좌익세포들까지 잡아내는데 착수했다.
압수된 재보에 의하면 오일균은 육사담당의 세포책임자였다. 군내 사병이나 민간인 좌익들을 육사에 입교시키고 입교한 생도들을 포섭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특히 그가 처음부터 가르친 육사3기생은 좋은 포섭대상이었다.
김창룡은 오일균을 추적하여 서울적선동에 있던 어느 세탁소에서 체포했다. 김종석도 충무로3가의 어떤절에 숨어있다가 김창룡에게 검거됐다.
김창룡은 평양출신 이재복(당시46세)의 정체도 알아내 48년12윌28일 신당동377 그의 자택에서 무난히 검거하고 그의 부책인 김용수도 체포했다.
대구지역의 숙군은 부산의 제3여단 참모장 이영순중령의 지휘로 진행됐다. 대구 6연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이중령은 법무장교 3명과 헌병 l개소대를 이끌고 대구에 가서 1차로 혐의있는 장병 4백여명을 조사하여 그중 1백12명을 가려내 6명을 사형, 나머지를 징역형에 처했다.
숙군과정엔 어려움도 않았다. 숙군담당장교들은 목숨을 걸고 해낸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매일밤 잠자리를 비밀리에 옮겨 다니며 침식을 이어 나갔고 방에는 권총을 머리맡에 두고 자야 했다.
대구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6연대정보주임 신철대위도 숙군요원으로 차출되어 이영순중령을 보좌하고 있었다.
6연대에 관한 정보를 그가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대구의 김창룡」 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대위는 49년1월18일밤 집으로 옷을 갈아 입으러 갔다가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저격범들의 습격을 받았다.
신대위가 지프로 집앞에 이르러 차에서 내리고 있을 때 좌익계 민간인 3명이 권총을 쏘아 쓰러졌다. 범인들은 신대위에게 달려들어 구둣발로 짓이기고 도망갔다. 그러나 그중 1명은 신대위가 응사한 권총을 맞아 현장에서 죽고 나머지는 모두 체포돼사형됐다.
신대위는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다.
그때 대구시내에는 『이영순을 죽여라』 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들은 이중령의 치약에 독약을 넣어 이중령이 이것을 쓰고 한동안 고통을 겪은 일도 있다고 한다.
숙군반에는 김득룡·정강·송대순·이왕석·차호성·정린택·김안일등이 추가됐는데, 그들도 한결같이 갖은 모략과 협박을 받으면서 숙군을 해낸것이다.
그렇게 진행된 숙군은 전후 4차례 반복되어 총1천3백여명을 처벌했다.
그러나 과학적인 수사가 뒷받침되지 못한채 서둘러 진행하는 바람에 부작용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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