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생을 이끌어주는게 참다운 교육 아닌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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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겨울달력을 뜯어내고 3월을 마주본다. 올겨울은 따뜻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3월 봄기운이 다르다. 움츠린 마음을 자연앞에 펴고싶다. 매일 보고 돋는 일들로 복잡해진 머리를 비우고 순수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맘때면 주위에서도 시작의 물결이 일렁인다. 학원가에선 수만명의 신입생을 맞아 3월의 테이프를 끊는다. 그들의 젊음 때문인지 대학입학생들의 모습은 시작 그자체처럼 신선하다.
그런데 시작의 선두를 달리는 이들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은 웬일일까. 얼마전 신문에서 본 「탈락」이란 활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대학 ○○○명 탈락, ××대학 ××명 탈락 한지면에 탈락이란 활자가 여기 저기 박혀있었고 그것이 눈에 뛸때마다 나는 공연히 뜨끔했다.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또 탈락제에 걸리지않기위해 젊은이들은 많은 것을 빼앗기지 않을까. 내가 지금 대학생이라면 탈락자명단에 끼었을 것 같고 그런 상상을 하니 10년전 나의 대학시절이 그리워진다. 또 한 친구가.
눈이 큰 아이였다. 눈썹을 숯검정으로 칠하듯 한일자로 시커멓게 긋고 다니던 괴짜였다. 내가 그 아이를 「발견」한것은 모교에서의 첫 채플시간이었다. 교목님이 어떻게 대학생활을 잘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말한뒤 기도로써 끝맺음을 할 차례였다.
『기도합시다』강당에 앉은이 l천여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고개숙였다. 나도 눈을 감으려다 흘낏 내 옆자리를 보았다. 내옆자리의 아이는 고개도 숙이지 않고 똑바로 교단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것은 거부의 눈이었고 나는 순간적으로 그 아이에게 매혹됐다.
그는 내가 여태 보아왔던 여느 사람과도 달랐다. 외부의 눈길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옷장에서 막 꺼낸 듯한 구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가 하면 머리를 빗지도 않고 학교에 나왔다.「니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은 잘 들고 다니지만 강의실에서도 휑한 눈으로 교단을 바라볼 뿐 특별히 공부하지는 않았다. 흥미없는 과목은 출석률 미달로 F학점을 받았다.
학점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결과로 2년뒤 그아이는 F학점을 6개나 받았다. 주위의 반응은『그렇게 되기도 힘들다』였다. 관심도 없는 학점에 연연해하기 싫어서 그아이는 휴학을 했다. 졸업장에도 큰 가치를 두지않아 그뒤 다시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 대학생활은 이 아이와의 만남을 빼곤 말할 수 없다. 나는 그를 통해 기존질서의 허상을 볼 수 있었다. 관습과 제도에 길들여지지 않아서 이방인이 된 그에게서 나는 진신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지금 대학생이라면 분명 탈락감이다. 성적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몇프로 자르기로된 제도 때문에.
교육이란 무엇보다 인간존중정신에서 출발되어야한다. 교육은 우등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뒤처지는 사람들에게 자기발견의 기회를 주고 그들이 잘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다. 어느 분 말씀대로 대학입시에 몇사람이 붙었나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몇사람이 떨어졌나를 생각해야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교때까지도 암기식 교육을 하고 있어서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적성과 개성을 개발할 수 있다. 그런데 탈락제도는 대학생 스스로가 제도에 길들여져 창의적이 아닌 학점벌레로 추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고교때는 친구의 노트까지 찢으며 내신성적 경쟁을 하고 대학에 와선 출석 따위로 교수실을 찾아다닌다.
기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런 분위기를 한 대학생은 극단적으로 표현했다. 진리탐구하러 대학 온다는건 말짱 거짓말이라고. 인격도 없다고.
일전에 외국서 돌아온 분이 서양과 한국의 인격교육차이를 비교했다.
한국사람들은 누구를 만날 때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곧잘 묻는다. 선을 볼 땐 학벌이나 직위가 간판이 된다. 신문에는 혼수감 기사까지 난다. 혼수감 없으면 결혼도 못하나?
이 사회는 사람을 인격으로가 아니라 출신성분으로 본다.
허식의 관습 제도에 우리가 묶여있기 때문이다. 이 계절엔 무엇보다 거울 들여다보기부터 시작하겠다.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껍데기를 나는 얼마나 껴입고있는지 알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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