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8) 제79화 육사졸업생들(101) 7기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육사7기에는「정규반」「특별반」「후기반」이 있었다. 이들은 입학날짜나 교육기간·교육내용·임관일자가 달랐고 구성원들도 이질적이었을 뿐 아니라 임관 후 뻗어나가는 양상도 판이했다.
정규반은 일반 민간인과 사병중에서 모집했고 특별반은 군사경험이 있는 자들로 충원했다. 그러나 7기 후반은 주로 공병·통신 등 특과 출신의 고급하사관들을 각 연대에서 차출하여 뽑았다.
이들은「7기」라는 공통숫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별개 그룹으로 인정하고 친목모임도 별도로 갖고있다.
당초 7기는 민간인 출신으로만 충원할 계획이었다. 즉 현역하사관과 사병들만으로 구성된 6기와 동시에 선발하여 기초 훈련이 이미 되어있는 6기는 즉시 태릉의 사관학교에 입교시켜 3개월 후 임관시키고, 기초훈련이 없는 민간인출신의 7기는 각 연대에 분산 배치하여 3개월간 기초훈련을 시킨 뒤 6기가 졸업하고 나간 후 육사에 입교시켜 역시 3개월간의 사관교육을 시켜 임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군의 갑작스런 팽창으로 장교의 수요가 급증한데다 군사경력 보유자들 다수가 아직도 군에 참여치 않고 있어 이를 일괄 해결하려는 정책적 의도에서 「7특」과 「7후」가 추가된 것이다.
제주도나 여순 지리산 공비토벌 때는 장교가 모자라 상사나 중사가 소대장을 한적도 있었고 새로 생긴 연대에서는 장교가 2개중대에 한 명 꼴에 불과했다.
14연대에서 반란직전 한쪽 중대의 중대장이던 홍순석이 순천에 배치된 2개 중대를 마음대로 이끌고 반란군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판규 소위가 행정장교·본부중대장·대전차중대장·식사관·보급관·부관대리를 겸직하여 장교 6명분의 일을 맡고 있었던 것도 모두 장교부족 때문이었다.
정규7기의 입교과정은 이원적이었다. 1차로 선발된 팀은 6기와 동시 모집된 민간인 출신들이고 2차 선발은 각 연대에서 추천 받은 사병출신들이었다.
1차팀 2백79명은 당초 계획대로 6기 입교보다 10일 늦은 48년5월15일부터 각 연대에서 기초훈련에 들어갔다. 이것을 가입교라 불렀다.
정식입교는 3개월 후인 8월9일이었다. 이때부터 2차로 선방된 사병출신 3백26명과 함께 태릉의 육사에서 정식 사관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정규반 1차선발의 민간인 출신들은 5기생의 경우와 여러 면에서 유사했다. 즉 순수민간인 출신에다 교육기간도 6개월이었고 사회적 배경도 북한에서 공산당의 박해를 받다가 남하한 우익청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반공의식이 철저했다. 학력도 비슷하여 구제중학 5년을 졸업했거나 대학1, 2년 재학중인 젊은이들이 많았다.
모집당시 반탁이다, 찬탁이다로 시달리다가 비로소 국회의원선거와 정부수립 일정이 확정돼 발표되었다.
따라서 혼란의 와중에서 비록 반쪽이나마 우리정부가 세워진다는 명백한 때였고 이에따라 혈기넘치는 애국청년들이 남북통일의 선봉이 되겠다는 의지로 사관학교로 몰렸다.
48년8월15일 정부수립 때는 사관생도로서 서울시내 기념퍼레이드를 벌였고 식장에 배치된 사관생도도 모두 정규7기생들이었다.「7특」이나 「7후」는 아직 입교하기 전이었던 것이다.
7기 정규는 졸업을 앞두고 태릉에서 장충단공원까지 행군하여 거기서 3일간 숙영하는 훈련과정이 있었다.
당시는 여순반란이 일어난 직후여서 국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동요되고 있을 때인데 후보생들의 행군대열이 서울시내 한복판을 통과하자 시민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마치 국군의 건재를 확인한 국민들로부터 군이 재신임을 받는 기분이었다.
당시 행군 때는 미군이 2차대전 때 쓰던 철모를 그대로 썼는데 철모 안에 쓰는 파이버가 없어 풀이나 수건을 넣어 그 위에 철모를 얹어 쓰고 다녔다.
「7특」은 4차에 걸쳐 2백46명이 입교했다. 세 번째 입교 때는 1명뿐이었다. 이들은 48년10월12일 임관했다. 「7후」는 3백45명이 11월22일 입교하여 12월21일 임관됐다. 따라서 7기를 모두 합하면 1천1백52명이다.
7기 정규는 건국이전에 입교했으나 「7특」이나 「7후」는 건국 후에 입교한 것이 된다. 7기는 모두 건국 후 최초의 육사졸업생이다.
개학중인 9월5일에는 교명도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육군사관학교로 바뀌었다. 이점에서 7기들은 남다른 긍지를 가진다고 말한다.
7기 정규는 임관 후 모두 전투병과(보병·포병·기갑)로 배치됐고 「7특」은 전투병과 및 공병·통신 등 기술병과로 나갔고 일부는 후에 공군으로 가서 창설요원이 됐다. 윤응렬 장군(57·평남·공군소장)이 그런 케이스다.
7기후반은 당초 공법·통신·법무·군의 하사관들도 뽑았기 때문에 임관 때의 병과분류에 그대로 반영됐다.「7후」의 경우는 공비토벌에 참전중인 고급하사관으로 현지임관된 사람도 다수 있다. 이들은 작전 중 부대를 떠날 수가 없어 사관학교에 입교치 않고 소위로 임관되어 7기 후반에 편입 처리된 것이다.
또 구대장들이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5기생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기합은 훨씬 심했지만 충실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7기생들은 졸업하자마자 제주도와 여순 및 지리산지구의 공비토벌작전 때 최일선 소대장으로 싸웠으며 6·25사변 발발당시는 모두가 일선 중대장 혹은 대대참모로 활약하는 등 임관 초부터 야전에서 분투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