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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물류 대란 누가 키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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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올 들어 발생한 노동사건 가운데 파장이 큰 두산중공업 사태와 화물연대 파업의 중심엔 두 노동자의 죽음이 있다.

두산중공업 노조원 배달호(50)씨는 지난 1월 9일 월급 가압류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과 해고자의 고통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했다. 노사 간의 불신과 갈등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그대로 보여준 그의 죽음은 63일간 이어진 분규에 도화선이 됐다.

화물연대 포항지부 조합원 박상준(33)씨는 그들의 움직임이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할 당시인 지난달 27일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늘어나는 빚을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다.화물연대의 투쟁을 반드시 승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을 택했다. 그의 죽음은 화물연대 조합원들의 결속력을 높이고 투쟁 의지에 기름을 부었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해도 죽음이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 죽음이 미화되거나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이용돼서도 안된다.

그러나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절규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면 제대로 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물류 대란을 가져온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이 결코 용인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론 영세 차주들의 절실한 목소리가 호소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물차주들은 도로의 무법자, 고속도로 파손의 주범이란 악명도 얻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 경제를 지탱해주는 물류의 전사들이다. 한밤중에 커피로 졸음을 달래며 빚을 갚거나 차량 할부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고속도로를 달린다.

자살한 박상준씨도 바로 이런 영세 지입차주였다. 아내와 여섯살.네살짜리 남매를 둔 朴씨는 9년째 트럭을 운전하며 소형 임대주택에서 살아 왔다.

지난해 25t 트레일러를 구입하며 빌린 8천만원이 줄어들기는커녕 1년 사이에 1천만원 가까이 더 늘어난 빚을 고민하던 그는 음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朴씨의 동료들은 그의 죽음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고 왜곡된 운송체계가 낳은 비극이라고 말한다. 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한 지입차주제와 다단계 알선이 빚어내는 착취 구조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이다.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한사람당 평균 3천5백만원의 빚을 지고 있으니 공감대가 클 수밖에 없다.

화물차주들이 결속하고 행동에 나선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지난해 10월 화물연대를 결성한 이들이 지난 2월 민주노총 전국화물운송노조에 준조합원으로 가입하면서 참여자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포항.부산 집회와 고속도로 저속운행 등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 이들이 '실력'을 보여준 것은 지난달 30일 1만여명이 트럭을 몰고 과천 일대 교통을 마비시킨 1박2일간의 상경투쟁이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플래카드가 물결을 이루고 공단.항만 등 봉쇄가 예고된 것도 이때였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데도 정부는 태평했다. 지난달 21일부터 화물연대가 건교부.산자부.재경부.노동부 등과 벌인 실무협의회에 나온 관리들은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했다. 관련 업무가 흩어져 있다 보니 적극 나서는 부처가 없었고, 이를 종합조정할 기능도 작동되지 않았다.

정부가 이 모양이니 운송업체 등 당사자들도 손을 놓았다. 실제 상황이 터진 뒤 보인 정부의 무기력한 모습은 "위기상황 대처에 공백상태"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질책 그대로다.

영세 화물차주들은 물류를 멈춰 세상을 뒤흔들었다. 힘 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이들이 겪는 고통과 불만을 줄여주는 것이 정부의 임무다. 이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번 화물연대 파업은 보여준다.

한천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