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장 써놨다는 노기남대주교|다시 태어나도 사제직맡겠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피아트 볼룬 타스투아』 (「당신의 뜻대로」라는 라틴어)-. 한국 가톨릭 2백년사의 산증인이며 최초의 한국인가톨릭주교인노기남대주교의 좌우명이다.
노대주교는 최근 간기능약화로 서울명동성모병원에서 2개윌째 요양중이면서도 81회 생신(1월22일)과 구정을 큰 조카집에 가 손자손녀들의 재롱을 보며 즐겁게 보냈고 안양 성나자로마을성당의 구정미사를 직접 집전하기도 했다. 노대주교는 18일상오 병실로 문병을 겸해 새해인사를 간 기자를 반겼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는 보신탕을 요즘도 자주 드느냐고 물어보았다.

<일부 위독설 뿌리쳐>
『병원에 가져다 먹기도하고 구정때는 안양 성나자로마을에 내려가 3일 있는동안 황구 한마리를 고아먹고 왔어요. 의사가 염분을 전혀 먹지말라고해 백숙으로 푹 삶은 국물을 마시는데 그래도 내입맛에는 보신탕이 최고야.』
17살까지 황해도 신계두메산골에서 산「시골촌놈」이라 어려서부터 보신탕맛을 들였고 서당책씻이를 할때마다 보신탕 잔치를 했다는 함대주교는 『개들이 노주교 온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도망친다』는 일화까지 남겼다.
-대주교께서는 최근 모든 주변정리를 하셨다는 얘기가 있는데 성직자로서 확실히 느끼신 생사관이 계시다면.
『죽음이란 질서정연한 우주 대자연의 섭리입니다. 81회 생일을 맞으면서 정말 세월이 빠르다는것을 새삼 느꼈어요. 그래서 요즈음은 「선생복종」 (착하게 살면 복되게 죽는다)는 내인생관을 과연 성취했는가를 깊이 생각해보며 매일 심각한 기도를 올리고 있읍니다.
특히 얼마전 박순천여사가 별세하기 사흘전 나를 찾아와 기념사진까지 찍었었는데 정말 노인의 건강은 장담할수 없다는걸 실감했어요.
인간은 막상 죽음을 예비해야 합니다. 한번 지나간 시간은 영원히 다시오지않고 모든 생명체는 언제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뿐 「죽음의 후회」란 있을수 없는것이지요. 세상을 흔히 고해라고도 말하지만 인간은 세상에 와서 「나」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다가 언젠가는 죽음의 항구에 기착하게 되는 겁니다.』
-대주교님의 병세이야기와 함께 유언장이야기까지 나왔는데요.
『내가 「위독」하다고 보도돼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문병을 와 걱정들을 해주어 언짢은 기분조차 듭니다.
물론 유언장도 써놓았고 각종 기록이나 유물들도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절두산성당박물관등으로 가져가도록한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나의 신변정리는 이미 67년 일선사목직에서 물러나 안양 성나자로마을로 은퇴하면서부터 시작해 오래전에 끝낸 일입니다. 나자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퇴원을 하고 싶은데 의사가 만류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있을 작정입니다.』
-성직생활중의 가장 어려웠던 일과 보람을 느꼈던 일은.

<일반 학교는 못가봐>
『성직생활 50년동안 가장 행복했던 황금시절은 명동성당보좌신부 12년간이었고 가장 어려웠던 시절은 주교시절이었어요. 1942년 주교품을 받아 한국가톨릭의 10번째주교(9대까지는 모두 프랑스주교)이며 한국인 최초의 주교가 돼 한국가톨릭을 대표하면서 겪은 어려움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특히 당시 이승만대통령에게 불려가 회초리를 맞았다는 풍문까지 나돌았고 로마교황청에서까지 나와 압력을 가했던 K신문 폐간문제를 둘러싼 파란은 정말 고통스러웠읍니다.
나는 8·15해방후 이박사 입국, 미군진주관영미사를 명동성당에서 올리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지지해 이박사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었지요.
이박사도 나를 보면 『미국서는 감리교였지만 진짜 나의 미국친구들은 가톨릭주교들』이라면서 비숍노도 훌륭한 나의 친구라고 했어요.』
함주교는 다시 태어나도 사제가 되겠다는 말을 한일이 있고 지금도 그런 심경에는 변화가 없단다.
(함대주교는 원장이 회진을 왔는데도 괜찮다면서 초롱초롱한 기억으로 옛이야기들과 자신의 정치관 인생관등을 다음과 같이 펼쳐나갔다.)

<정치주교란 오해도>
원래 노대주교의 출생지는 평양인데 12살때 황해도 신계로 이사를해 17살까지 한문서당에 다녔다. 「사서이경」까지 모두 마쳤는데 언제나 칠통으론 「일부살육통」(여섯번을 줄줄 외고 한번만 틀려도 불합격)인 서당의 우등상을 받았다.
일반학교는 근처도 못가본채 서울로 올라와 소충학교에 입학, 대신학교까지 졸업하고 1930년 신부서품을 받았다.
시골성당 보좌신부로나 갈줄 알았는데 한국가톨릭의 얼굴성당인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을 받아「시골 촌놈」으로선 너무나도 과분한 감격이 아닐수 없었다고 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이 발악을 하면서 한국의 종교단체 대표들도 모두일본인으로 만들려던때인 1942년 바티칸의 가톨릭토착화정책에 따라 강제 일본이름까지 붙은 「노 오까모또 바오로」인 그에게 교황의 주교임명장이 날아왔다.
그는 너무나도 감격, 주교품을 완강히 사양하면서 교황의 임명장을 반송하려했으나 프랑스인 주교의 간곡한 설득을 받고 「당신의 뜻대로」라는 평소의 좌우명을 내걸고 수락했다고 한다.
종교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되지만 그는 정치가 바로 서고 민주주의가 확립돼야 교회도 바로 설수 있다는 신념에서 한때 K신문 사장을 맡아왔는데 「정치주교」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6·25때는 프랑스 체류중 마침 주불대사교체로 후임 윤치영대사가 부임치못했던 공백의 대사관에서 그는 대사노릇을 했다. 프랑스군의 한국전참가를 반대하는 파리대학생들이 데모를 벌이며 한국대사관 간판을 떼어 던져버린것을 다시 주워다 붙이고 그가 나서서 북괴침략의 실상을 설명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호소하기도했다.
-「정치주교」라고 불린데 대한 후회같은것은 없으신지.
『지금 이 시간까지 추호의 후회도 해본일이 없읍니다. 오직 민족을 위해 봉사했다는 자부심을 가질뿐입니다.』
-끝으로 후배 사제들에게 하고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가톨릭은 65년 바티칸공의회이후 완전히 세대가 교체됐읍니다. 내가 은퇴를 결심했던것도 새로운 시대의 젊은사제들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세대간의 간격을 실감했기 때문이었어요.
바티칸공의회가 제기한 중요 과제의 하나는 가톨릭의 토착화였는데 한국가톨릭의 경우 라틴어를 쓰던 미사용어가 한국말로 바뀌고 추기경까지 갖는등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했읍니다.
나는 기도회등을 통해 정치적 발언을 서슴치않고 성당에서 특정 정권을 지칭해 물러나라는 강연까지하는 「교회의 사회참여」는 절대 반대합니다. 물론 한국의 정치현실이 완전한 민주주의에는 아직 부실한 점이 많이 보이지만 사제들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것은 있을수없는 일이지요. 교황청도 이점을 분명히해 사제의 직접 정치참여를 단호히 막고있어요.
그래서 어떤 사제들은 나보고 은퇴했으면 가만히 있지 공연히 나선다고 불만스러워하고 있는 줄을 알고있읍니다.』<이반윤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