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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비장의 승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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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의 압승은 정치의 묘미를 한껏 보여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던진 중의원 해산과 총선이란 승부수가 보기 좋게 적중했기 때문이다. 중의원 해산 당시에는 자민당이 참패할 것이란 관측이 유력했었다. 무모한 정면 승부를 걸어 '자멸'의 길을 택했다는 분석이었다. 오죽했으면 '도박'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그러나 고이즈미는 이런 비세를 뒤집고 역대 최고의 압도적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대역전의 정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고이즈미의 대역전승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우정 민영화'를 기치로 내건 개혁 이미지가 먹혔다거나, 개혁 노선을 거역하고 당을 뛰쳐나간 반란파를 겨냥해 '맞춤형 자객 후보'를 내세운 선거 전략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그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공학적 분석은 정작 승리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을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일본 경제의 부흥이다. 만일 일본 경제가 10년 불황을 이기지 못한 채 여전히 죽을 쑤고 있었다면 고이즈미 총리가 과연 총선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아니 중의원 해산과 총선이란 승부수를 던질 수나 있었을까. 경제 회생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면 그는 감히 자신의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는 '회심의 카드'를 꺼낼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집권 기간 중에 경제를 살려냈다는 자부심과, 자신이 추구해 온 개혁 노선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그가 건곤일척의 정치적 도박을 걸 수 있었던 비장의 카드였다. 그는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패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 통계는 고이즈미 승부수의 근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2분기 일본 경제는 당초 예상치 1.1%의 세 배인 3.3%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장의 내용 또한 탄탄하다. 수출에만 의존하는 외바퀴 성장이 아니라 소비와 투자 등 내수(內需)가 주도하는 안정적인 성장 구조로 탈바꿈했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대거 몰리고 주가는 급등세를 타고 있다. 고이즈미 경제 개혁에 대한 지지와 기대감의 반영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추진하는 경제 개혁의 핵심은 감세(減稅)와 규제 완화다. '우정 민영화'는 경제 권력을 관(官)에서 민(民)으로 이양한다는 고이즈미식 개혁의 상징이다. 민간 주도, 시장 중심의 경제 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감세와 규제 완화는 기업의 투자 의욕을 북돋웠다. 이는 기업의 투자 확대-경기 호전-고용과 소득의 증가-소비 촉진으로 이어지는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낳았다.

이제 눈을 국내로 돌려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을 통째로 내놓을 수도 있는 '연정(聯政)'이라는 비장의 승부수를 던졌다. 그러나 부정적인 국민여론과 한나라당의 외면으로 이 회심의 카드는 초장부터 빛이 바랬다. 사실 노 대통령은 취임 이래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승부수를 날렸다. 탄핵 정국에 이은 총선 승리처럼 정면 돌파에 성공한 적도 있었지만 동북아 균형자론이나 과거사 논란처럼 갈등과 대립만 증폭시킨 채 유야무야된 적이 많았다.

왜 그랬을까. 우선 비장의 승부수는 자주 던지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나 쓰는 것이지 아무 때나 꺼내드는 게 아니다. 또 한 가지는 승부처를 잘못 짚는 실수가 잦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책을 제대로 펴지 못해 지지율이 낮은 것을 거꾸로 지지율이 낮아서 정책을 펴기 어렵다고 곡해하는 경우가 그렇다.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면 잘못된 카드를 꺼내기 쉽다. 정치를 바로잡아야 경제가 산다며 정치 개혁에 매진하는 것도 맥을 잘못 짚은 사례다. 경제 살리기라는 승부처를 제쳐 두고 엉뚱한 곳에서 승부를 거는 것이다.

무엇보다 노 대통령이 도박을 걸기에는 들고 있는 패가 허름하다. 집권 이후 경제는 내내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놓을 실적이 마땅치 않다. 여기다 그의 개혁은 과거를 깨자는 것이다. 미래를 열자는 고이즈미의 개혁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