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자유당과 내각(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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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민방위군 보급문제는 1월이래 국회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고 국방부는 최소선의 예산 조달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었다.
합동헌병대가 2월에 포착한 국민방위군 부정은 보급식량 2천3백가마를 빼돌려 양조장등에 부정처분한 사실이었다. 이때 신생모국방은 수사를 승인하면서 다만 <그렇잖아도 국회에서 떠들고 있으니 비밀로 하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신국방은 곧바로 장경근차관을 불러 국민방의군 부정사건은 확대되지 않도록 견제하라고 지시했다.

<한때 수사에 압력>
합동헌병대의 수사는 계속 확대되어 방위군 수뇌진이 모두 수사대상이 되기에 이르렀을 때 수사중단명령이 내려왔다. 헌병사령부는 3월에 압력을 뿌리칠수 있는 기회가 왔다. 마침 이대통령이 대구로 시찰나와 경북지사로 하라는 당부였다. 그런데 헌병사령부, 간부들이 나가고 나자 장경근차관을 불러 수사는 적정선에서 멈추도록 견제해줄 것을 지시했고 부정이 밝혀져 사령관 김윤근에게까지 파급돼 나가자 수사중단을 명령하고 말았다. 헌병사령부는 3월중순 압력을 거부할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마침 이대통령이 대구로 시찰나와 경북지사 관저에 머무르고 있었다. 헌병사령부 수사과장 윤우경중령은 대통령 경호책임자 김장흥총경을 찾아갔다. 김총경은 윤중령이 수도경찰청총무과장이던 때 부하였다. 그는 김총경에게 국민방위군 부정사건수사가 중단된 과정을 설명하고 대통령을 움직여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튿날 윤중령은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대통령은 김총경으로부터 얘기를 들은 듯 대뜸 <국민방위군에 부정이 많은데 수사를 못하게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윤중령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염려말고 수사를 해>라는 얘기였다. 이때서야 윤중령은 <군대는 명령계통이 있습니다. 국방장관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면담은 짧게 끝났다.
그 다음낱 최경록헌병사령관과 윤중령은 신국방장관에게 불려갔다. 방위군부정사건을 수사하라는 지시였다. 이렇게해서 수사는 재개되었다. 부정을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상납이 문제였다.
국회의원·고위장성, 심지어 대통령비서실에까지 거액의 뇌물이 건네진 것이 드러났다. 상납관계는 적정선에서 덮어버렸다 <이걸 몽땅 밝혀내 문제삼으면 정계는 물론 군대까지 흔들릴 판이었다. 남의 나라 원조를 받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형편에 부정사건이 들추어지면 국가이익에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 수사과장 윤중령의 얘기다. 그랬지만 신국방의 감독을 받는 기간 조사는 역시 미지근했다. 전기는 5월 신국방이 해임되고 이기붕이 국방을 맡게되면서였다.

<신국방 결국 해임>
5월12일 국민방위군 사건처리가 미온적인데 항의하는 국회대표단 조봉암·태완선·서범석·홍창섭등 네의원이 대통령을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방위군 부정은 내가 잘 알고 있다. 우수한 법관을 파견해서 재판을 다시 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방위군 관계자에 대한 두 번째 재판인 고등군법회의가 열리면서 당국은 관련 국회의원이 증언대에 서주도록 협조를 요청했다.
군법회의에 출두통지를 받은 의원은 신정동지회의 김종회 남송학 박승우 김인선 최성웅 김정두 김정식 김판석 이호근, 민우당의 이학림의원이었다. 이들 11명은 30여명으로 소문난관련의원중의 최소선이었다. 그랬지만 지청천의원만이 청년운동을 하던 동지들이 수시로 돈을 보냈는데 총액은 4백50만원이 될것이라고 시인했을뿐 다른의원들은 모두 관련사실을 부인했다.
정일권 총참모장도 그때 법정에 불려나와 육군본부 고급간부들의 인회비를 방위군에 떠넘긴데 대해 심문받았으나 전쟁지휘에 바빠 그런 내용은 모른다고 했다.
이때 무능장군으로 낙인찍혀 검열관이란 한직을 맡아 예편을 겨우 모면하고 있던 김석원장군은 증언을 마치고 나가는 정일권총참모장을 향해 「비겁자××」라고 욕설을 하는 촌극도 빚었다. 방위군사건의 책임자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 한달 뒤 형이 집행됐다. 국회는 방위군사건이야말로 이대통령정부의 돌이킬수 없는 과오라고 했다. 그러나 방위군 사건에서도 국회안정파들의 부패행위들이 드러난 것으로 보았다. 국회가 관련 의원들을 징벌하지 않는데 대해 대통령은 불만이었다.
대통령은 그가 물러나고 국회안 정파들의 조종을 받는 정부가 들어서서는 나라도 안되고전쟁도 수행할 수 없다고 했다.
민주당시대 야당가에선 부산 정치파동을 일컬어 당시 야당정파들이 내각책임제개헌을 추진한 것은 잘못된 전략으로 곧잘 얘기를 했었다.
그런 평가의 근거는 당시의 실정을 고려해서이다.
1·4후퇴로 전선이 밀리고 있던 그해 겨울 나라는 굶주림에 넘치고 있었다. 임시 수도가 된 부산은 피난민으로 초만원이었다. 식량은 말할것도 없고 식수조차 모자라 근40만의 피난민을 제주와 거제등지로 반강제로 이주시켰음에도 그때의 부산인구보다 더 많은 70만의 피난민이 부산을 메우고 있었다. 곳곳에 판잣집이 섰지만 집없는 피난민이 더 많았다.

<이박사 집념굳어>
한우수출기지로 부산진의 외딴부두에 지어켜있던 외양간까지 피난민수용소로 개조된 현상. 미군이 버린 깡통쓰레기에서 남은것들을 긁어모아 끓인 이른바 「꿀꿀이죽」을 파는 노점음식점앞에 줄지어선 영양실조의 피난민 행렬이 그때의 임시수도 부산의 참담한 모습을 상징했다.
대통령은 전쟁수행과 피난민구호를 위한 외교교섭에 매달려 있었다. 13개의 직통전화들에 매달려있거나 전선시찰. 피난민수용소방문이 대통령의 일과였다. 집무실에는 미군전방지휘소, 미대사관, 한국군사령부, 경찰, 동경의 연합군사령부등 중요부서와 연결되는 직통전화가 가실되어 있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전세가 불리해진 가운데 휴전론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대통령은 휴전안을 분쇄하고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연합군의 증파와 한국군 증강을 위한 무기원조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는 무기가 주어진다면 당장 새로운 한국군 50만을 증강할수 있다고 미국무성과 국방성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는 외국원조기관사람들과 함께 피난민수용소도 자주 방문했다.
휴전안을 분쇄해 통일을 이룩하고 국민을 굶주림에서 구제하는 일은 이승만말고는 달리 맡길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고 집념이었다. 내각책임제나 국회안의 정파들이 내세우는 어떤 사람도 이승만을 대신할수 없다는 것이 대통령의 판단이었다. 이리하여 전시정국은 거친 파동으로 점검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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