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총선, 독일의 선택은] "놀고 먹는 복지 더 이상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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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당(CDU)의 앙겔라 메르켈 당수가 집권하면 독일에서 사회정의는 사라질 것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집권한 이후 매일 1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슈뢰더는 책임져야 한다."

독일 총선이 임박한 12일 오전 베를린 시내 노이베스트엔드 지하철역 앞.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집권 사민당(SPD)과 야당인 기민당 측 운동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한 막판 경쟁이 뜨겁다.

18일 총선을 앞두고 독일이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조합주의'적 노사관계를 토대로 '라인강의 기적'을 일궈냈다. 시장경제에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로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룬 유럽형 복지국가의 모델을 구현했다. 또 노사 공존과 타협을 핵심으로 하는 조합주의적 전통으로 노사갈등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통일 15년이 흐른 지금 독일식 사회발전 모델은 흘러간 옛 얘기가 됐다. 복지와 사회정의에 역점을 둔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는 '놀고먹는 복지'의 폐해를 낳았다. 매년 예산의 60%를 밑빠진 독에 물붓듯 사회복지 제도에 쏟아붓고 있다. 또 단체교섭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업경영 방식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앗아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다.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꺼리면서 실업률은 갈수록 치솟아 11.5%까지 올라갔다. 현재 500만 명이 실업자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독일병'이다. 게다가 90년 동.서독 통일은 결정적 부담으로 작용했다. 그동안 동독 재건에 쏟아부은 돈만 약 1조2500억 유로(약 1600조원)에 달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 의식에는 슈뢰더나 메르켈이나 차이가 없다. 개혁을 통해 '독일병'을 치유해야 한다는 데도 이견이 없다. 개혁의 방향과 속도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수술을 통해 '독일병'을 치유하는 집도의로 지난 7년을 보낸 슈뢰더는 "그동안 추진해온 개혁정책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며 "조금만 참아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자신이 주도한 개혁 프로그램인 '어젠다 2010'과 '하르츠Ⅳ'법으로 노동시장이 유연해지고 '일하는 복지'가 정착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메르켈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며 개혁의 고삐를 더욱 바짝 조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자 해고 관련법을 완화하고 부대비용을 축소해 기업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겠다고 공약하고 있다.

독일 최초의 여성총리를 노리는 메르켈은 '영국병'을 치유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를 본보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메르켈도 사회적 시장경제와 조합주의적 노사관계라는 독일 모델의 기본틀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슈뢰더의 성장.복지 절충형 개혁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과감하게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도입, 성장우선형 개혁을 밀어붙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제2의 대처'라는 별명을 얻었다.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기사당 연합은 그동안 여론조사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 왔다. 하지만 선거가 임박하면서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슈뢰더의 개혁에 반기를 들었던 노조와 서민층이 다시 사민당 지지로 돌아서면서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녹색당 연합 사이의 지지율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다.

다시 한번 슈뢰더냐, '독일의 대처'를 노리는 메르켈이냐. 6100만 독일 유권자들은 고민하고 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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