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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국인의 밥상' 200회 맞는 최불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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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배우 최불암(74)은 4년 전부터 매주 우리 고유의 밥상을 찾아 지방을 떠돈다. KBS1 교양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목 오후 7시30분)의 진행자이자 내레이터로서다. 한국인이 물려받은 다양한 먹거리를 사람 사는 모습과 버무려 소개해 왔다. 최씨는 “요즘 어린아이들은 나를 ‘밥상 할아버지’라고 부른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인의 밥상’이 내년 정월 200회를 맞는다. 최씨를 지난 14일 만났다. 서울 홍대 거리와 오장동 중부시장 촬영 짬짬이 말을 건넸다. 촬영 내내 박 반장(수사반장)이자 양촌리 김 회장(전원일기)인 그에게 자석처럼 끌려온 사람들이 몸을 치댔다. 촬영은 좀체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인터뷰 장소도 홍대 밥집이나 시장통 뒷골목을 전전했다.

최불암은 숱한 음식 가운데 나물이 가장 좋다고 했다. 건어물상이 즐비한 서울 중부시장을 지나면서는 “요즘 젊은이들은 백화점에서 식욕을 느낀다지만 나는 재래시장 오면 정말 돈을 쓰고 싶어. 멸치 꽁다리 하나라도 말이야”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온갖 음식을 맛보셨겠습니다.

 “사람들이 제일 좋은 거 다 먹고 다닌다 그러지. 사실 음식은 맛이 없을 때가 많아. 우리가 조미료에 젖어 있잖아. 카메라가 쳐다보니 조미료를 못 넣지. 그럼 그냥 ‘맛이 없네요’ 그래(웃음).”

 - 요새 시골 인심은 좀 어떻습니까.

 “전남 어디였더라. 내가 다리에서 물가를 내려다보면서 독백을 하는 장면이었어. ‘이 물은 어디서 흘러왔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하는 문장이었는데. 저기 멀리서 카메라가 나를 당겨서 찍고 있었어. 대사를 한참 읊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지나가려다 말고 나를 붙잡아. 그러더니 ‘아침은 자셨습니까. 아침 잡숩시다’ 하더라고. ‘촬영하는데 가서 밥먹자고 하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카메라가 어딨냐’는 거야. 알고 보니 내가 혹시 자살할까 봐 그랬던 거야.”

 -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딥니까.

 “지리산이 아닐까 싶어. 경치도 그렇고 춥고 바람 불 때 촬영해서 고생한 때문인지. 음식도 그래. 생전 못 본 나물이 있고, 간도 다르고 맛도 달라. 물어보니 좋은 소금에 들기름 한 방울이면 된다던데. 강원도도 좋았어. 사람 사는 집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어. 그래서 소통을 위한 음식을 만들었다더군. 말하자면 간식이지. 두부도 그렇고, 강냉이도 그렇고.”

 - 다른 지역들은 섭섭하겠습니다.

 “경상도가 음식이 맛없다고 그러는데, 거기 양반문화가 있어. 안동 쪽엔 제사 음식이 굉장히 발달했더라고. 만드는 것도 까다롭고 진짜 우리 음식의 혼이 있더군. 전라도는 정약전(1760∼1816)이 쓴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영향이 아주 커. 그래서 음식이 어느 지역보다 맛이 있고 계절음식이 잘 발달돼 있어. 충청도는 세상 모든 물건은 우리가 빌려 쓴다는 내용의 수필 ‘차마설(借馬說)’을 쓴 이곡(1298~1351·충남 서천 출생)의 영향이 있어서인지 밭이나 물을 잘 보전해 주겠다는 의식이 보이고…. 그런데 실제로 충청도 사람들은 이런 걸 잘 몰라.”

역시 정감이 넘치는 스타였다. 사람들은 최불암을 반가운 마음으로 맞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인사를 건네고 손을 내밀고 바짝 다가섰다. 우리 아버지·할아버지를 닮은 얼굴과 웃음 때문이리라.

 -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이북음식을 못 해본 게 매우 유감이야. 개성·평양, 그리고 함경도까지 올라가보는 게 꿈이지. 송해 선생이 그랬어. 전국노래자랑이 평양 갔었다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라고. 우리도 하고 싶은데 통일이 돼야지, 뭐.”

 최불암은 인천 태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황해도 출신이고 6·25전쟁 이후 인천에 정착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서울로 올라왔고 죽 거기서 살았다. 최씨는 “그러니 사실 고향이라고 할 곳이 없다”고 했다. 그가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게 된 건 아이러니하면서도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 사람들 인사에 답하느라 촬영조차 어렵군요.

 “시청자들도 날 보면 좋아하시고. 나도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 다들 실제로 보면 TV보다 젊다는 얘길 많이 하지. 50년 전부터 노인 역할을 했으니까, 어찌 보면 난 100살이 넘은 사람이지. 얼굴 손봤느냐는 얘기도 많이 들어(웃음).”

 - 어딜 가나 사람들이 알아보면 불편한 점도 있을 텐데요.

 “한번은 손이 시려 장갑을 끼고 있는데 누가 손을 덥석 잡아. 내가 얼떨결에 장갑 낀 손으로 잡았더니 인터넷에 오르더라고. 사람 반갑다는데 장갑 끼고 손잡느냐고 그러더라고. 이젠 촬영 들어가면 혹시 실수할까 봐 장갑을 안 끼지.”

 - 가장 힘든 점은 뭡니까.

 “사진을 찍자는 거지. 나도 찍고 싶지. 그래도 그게 좋지가 않아. 자기 음식점에 붙이기도 하고 자기 홈페이지에 올리고. 폐가 되지. 처음 보는 사람들 대하다 보면 늘 살갑게 하는 것도 쉽진 않더라고. 그래도 만나는 인연이 엄청난 건데 따뜻하게 맞으려고 애쓰지. 내가 드라마에서 늘 아버지였잖아. 우리 국민들이 식구고 형제고 자매지.”

 - ‘꽃보다 할배’ 때문에 어르신을 친근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는데요, 보셨습니까.

 “한번은 강연을 하는데 꽃할배 왜 안 나왔느냐는 질문이 나왔어. 왜 나오길 원하느냐고 했더니 아버지의 뒤를 밟아보고 싶대. 잘 때 어떻게 하나, 길은 어떻게 찾나, 이런 걸 젊은 세대들이 궁금해하는 모양이야. 아버지가 사는 선비방의 문틈을 들여다보는 맛이 좋대. 그런데 노인네가 길 못 찾고, 그런 건 싫더라고. 궁상을 그렇게 재미로 느껴야 돼? 등허리에 한을 지고 가슴에 해석 못한 시를 담은 게 아버지야.”

 - 최불암 시리즈는 어땠습니까.

 “세상을 풍자하는 건 좋다고 생각해. 한국인의 어수룩함을 보여줬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가면서 바뀐 에피소드가 다 담겨 있어서 무척 재밌어. 87년 민주화되고 88년에 시작됐지, 아마. 한 인쇄소에서 이걸 책으로 내고 싶다는 거야. 공부하다 스트레스 받는 애들이 그 얘기 듣고 웃는 게 좀 좋나, 장려한다고 했어. 성명권·초상권도 쓰자고 해서 ‘써라, 써’ 했지. 그 다음부터 애들이 나만 보면 웃음꽃이 피는 거야, 나만 보면. 얼마나 좋아.”

 - 기성 세대에 대한 반감이 심한 젊은이도 있는데요.

 “나이 먹은 이들 비하 심하잖아. 풍족에서 오는 거겠지. 가난을 기억하라고 하면 노인네나 꼰대 소리 듣는 거지. 옛날에 목숨 바치며 나랏일을 했다고. 월남전에 가서 싸웠지, 서독 가서 목숨 걸고 여자들은 병원에서 고생하고 남자들은 땅속에서 들어가서 살고 그랬는데. 옛날 얘기 하면 잔소리라고 해. ‘한국인의 밥상’도 일종의 잔소리야. 음식 만드는 잔소리. 잔소리가 교육이라고.”

 - 배우로서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69년에 ‘개구리 남편’이라는 드라마를 했어. 주인공을 맡았는데, 비서와의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었어. 국가 일을 하고 있는 역이었지. 한번은 비서와 태종대를 걷는 장면이 있었어. 촬영 마치고 집에 들어갔는데 PD한테 전화가 왔어. 촬영 때 입었던 옷 벗지 말고 그대로 나와라, 비상이 걸렸다고 하는 거야. 사랑 이야기를 다 빼라는 지시가 청와대에서 내려왔단 거지. 국가 녹을 먹으면서 일은 않고 연애하는 게 못마땅하다는 거야.”

 - 배우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무대올로기’ 시대가 됐다고 하더라고. 무대에 서는 사람들이 청중을 이끈다는 거지. 배우의 사명은 자신의 영향력을 잘 정리하는 거라고. 좋은 방송은 좋은 나라를 만든다고 생각해. 그런데 요즘은 부도덕한 얘기를 해서 시청자를 현혹하지. 재미있자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나는 한국인의 표준적인 상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고 봐. 미국의 카우보이 개척정신처럼. 질박하게 사는 한국인상, 맑고 깨끗한 기개 같은 것 말이야.”

글=이정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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