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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미지의 분자가 말라붙은 술방울을 아름답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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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6호 06면

사진작가 어니 버튼의 ‘사라지는 영혼들-싱글몰트 스카치 말라붙은 잔여물’ 사진 모음. [출처 어니 버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사진작가 어니 버튼은 그가 좋아하는 위스키 잔 바닥에서 예술을 찾았다. 8년 전 어느 날 버튼은 설거지를 하다가 유리잔 바닥에 스카치 위스키 몇 방울이 말라붙은 것을 발견했다. 허옇게 말라붙은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아름다워 보였다. 버튼은 “잔을 들어서 빛에 비춰보니 바닥에 섬세하고 얇은 선들이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었다. 수년 경력의 사진작가로서 뭔가 아름다운 걸 찾아낼 수 있다는 감이 왔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위스키 잔 속 비밀, 과학이 푼다

1 스코틀랜드 북동부 글렌리벳 지역의 글렌리벳 위스키 2 북부 오크니 제도의 하이랜드 파크 위스키

위스키 방울들이 창조한 사진들
그는 부인과 함께 다양한 향의 위스키를 몇 방울씩 잔 바닥에 떨어뜨려 말리는 실험을 시작했다. 서부 스코틀랜드 스카이섬, 아일래이섬에서는 스모키한 향, 피트 향 등 여러 가지 풍미의 스카치 위스키가 생산되는데, 이들은 다양한 향만큼이나 입자가 말라붙은 모양 또한 일정한 패턴 없이 제 맘대로였다. 멋진 링 모양을 표현해 내려니 더 많은 실험, 오류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반면 동북지역 리버 스페이 계곡에서 생산된 스카치는 균일한 패턴을 보였다.

 버튼은 “멋진 모양을 만드는 덴 한두 방울의 위스키면 충분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위스키 잔여물로 창조해 낸 예술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내기 위해 다양한 색깔의 조명에 비춰서 찍었다.

 그는 이 작품 시리즈에 ‘사라지는 영혼들-싱글몰트 스카치 말라붙은 잔여물’이란 이름을 붙였다.

 버튼의 실험은 술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밝혀냈다. 12년산 스카치 위스키는 더 비싼 18년산과 비슷한 패턴을 만들어냈다. 옥수수로 만든 미국산 버번 위스키도 바닥의 몇 방울이 스카치만큼 멋진 모양을 만들었지만, 미국 버번 위스키 회사인 짐 빔에서 나온 1년산 제이컵스 고스트 같은 미숙성 위스키는 아무리 말려도 어떤 모양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위스키의 말라붙은 모양을 수년간 찍던 버튼은 어느 날 그곳에 어떤 과학적 원리가 숨어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시작된 호기심을 갖고 그는 당시 펜실베이니아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피터 영커 박사를 찾았다. 박사는 컵에 담겨 있는 커피가 마를 때 균일하게 증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커피링 효과’를 연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커 박사는 당시 하버드대에 자리를 얻어 가기 전 박사학위를 마무리하느라 바빠서 버튼을 도와줄 수 없었다.

 버튼은 단념하지 않고 직접 구글 검색창에서 ‘유체역학’ ‘예술’ 등 검색어로 전문가를 찾아 나섰다. 그중 검색결과 상위에서 찾아낸 사람이 바로 프린스턴대 하워드 스톤 박사다. 버튼은 곧바로 박사에게 e메일로 연락했고, 박사와 연결됐다.

 스톤 박사는 “처음엔 이 연구를 통해 뭘 알아내고 싶은지 우리도 잘 몰랐다”고 회상했다. 자신이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은 아니지만 왜 숙성된 술의 잔여물이 일정한 패턴을 남기는지는 궁금했다고 한다.

12년산과 18년산 말라붙은 유형 비슷
박사는 “난 사실 위스키 향이나 맛도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연구하기에는 좋은 소재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일단 스톤 박사와 그의 연구팀은 글렌리벳·글렌피딕·맥켈란 등 싱글 몰트 스카치 몇 종류를 샀다. 다른 종류긴 해도 서로 비슷한 패턴의 링 모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구팀은 입자와 액체 사이의 상관관계에 따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직접 섞은 혼합물로 실험했다.영커 박사의 ‘커피링 효과’에 따르면 가장자리에서부터 마르는 물은 물방울의 중간에서부터 다시 채워진다. 그리고 이 유체 흐름이 입자들을 가장자리로 가져가며 컵 벽에 어두운 링을 형성한다.

 단 이 원리가 모든 액체에 적용되진 않는다고 말한다. 입자의 모양이 완벽한 구가 아닌 쌀알 모양일 땐 입자 모양이 물방울 표면을 변형시켜 컵 벽면의 가장자리에 군집하지 않고 액체 표면에 느슨한 입자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편평하게 골고루 마른다.

한국인 김형수 박사도 연구 참여
영커 박사는 이렇게 편평하게 마르는 음료수를 현실에서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박사는 “이렇게 마르는 현상이 나타나려면 모든 입자가 공평하게 커야 한다”고 설명한다. 스톤 박사 연구팀은 위스키와 커피 실험에서 가장 큰 차이는 위스키가 물과 에틸 알코올, 두 가지의 액체로 구성됐다는 점이라고 한다. 알코올은 물보다 빨리 증발하고, 위스키 속 물의 비중이 커지면서 위스키 방울의 표면장력이 바뀐다. 표면장력이 바뀌면서 유체의 흐름이 복잡해진다. 그게 바로 버튼이 사진에 담아낸 멋진 모양이다. 곧 조지아공대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할 예정인 영커 박사는 “이 실험은 물방울이 마르는 도중 유체의 흐름이 바뀌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프린스턴대에서 스톤 교수의 위스키 연구팀원 중 한 명인 한국인 김형수 박사는 사실 이 연구는 훨씬 복잡한 사연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인공적으로 배합한 물·알코올 그리고 여러 입자가 숙성된 위스키와 같은 패턴을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위스키가 물방울의 표면장력을 줄이는 계면활성제를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중합체라는 긴 실 같은 분자들이 유리잔 벽에 달라붙어 붓 자국 모양의 형판을 생성한다. 두 박사와 버튼은 위스키가 숙성되는 과정에서 아직 뭔가 밝혀지지 않은 이 분자가 위스키 안으로 들어간다고 추정한다.

 스톤 박사는 과학이라는 게 엉뚱하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이런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연구를 통해 입자를 고르게 쌓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프린터의 잉크 분사기술이 발달하는 등 우리 실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톤 박사는 “재료과학이 좀 더 우리 실생활과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번역=김지윤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jiyoon.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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