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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 전세계 확산 조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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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일본의 장기 불황을 초래한 디플레이션이 미국과 유럽.아시아에도 나타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디플레이션의 세계화'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각국 중앙은행들이 경고음을 쏟아내며 예방조치에 나섰다. 지속적인 물가하락을 의미하는 디플레이션은 경제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병이다. 가격 하락→기업 매출 감소→고용 축소의 악순환을 낳기 때문이다.

◆미국=1930년대 대공황 이후 물가 잡기에 매달려온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최근 디플레이션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지난 6일 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인플레이션보다는 물가 하락 가능성이 크다고 언급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FRB의 정책 비중이 디플레이션 방지로 옮겨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FRB는 이미 몇달 전부터 물가하락 현상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공개된 3월 18일 FOMC 회의록에 따르면 위원들은 당시 이미 디스인플레이션(디플레이션의 전단계)의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에너지와 식료품을 제외한 핵심 소비자물가지수가 계속 떨어지고 있는 점에 유의했다.

CNN머니도 약 2주 전 미국이 경기후퇴 및 디플레이션 위험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상황이 더 악화할 경우 FRB는 물가를 부추기는 조치를 취할 것으로 보인다. 추가 금리 인하와 함께 국채 매입 등을 통해 시중에 돈을 푸는 조치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유럽=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8일 기존 정책의 궤도 수정을 의미하는 발언을 했다. 지금까지 '물가상승률을 2% 아래로 묶는다'는 입장에서 '2% 가까이로 유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ECB는 디플레이션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일통화 유로를 사용하는 나라들의 물가상승률은 현재 2.4%로 지난해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른 시일 내 2% 아래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ECB의 발언은 예상되는 문제에 미리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독일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도 최근 '위기탈출 방안들'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지난 2년간 스태그플레이션에 가까운 경기침체를 겪은 경제가 올해도 미미하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분데스방크는 현재로선 디플레이션 위험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재정능력 저하와 실업자 증가를 동반한 장기 침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독일의 권위있는 경제연구소인 Ifo도 비슷한 경고를 했다. 유럽의 경제 중심인 독일의 지난해 성장률은 0.2%로 유로권 중 가장 낮았으며 연평균 물가상승률도 1.4%에 불과했다.

◆아시아=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세계경제 전망'에서 일본에 이어 중국.홍콩.싱가포르.대만 등에서도 디플레이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계 경제의 회복 지연과 과거의 과잉 설비가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진앙지인 일본의 경우 정부와 금융당국이 디플레 조짐을 사전에 포착하지 못해 현재까지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2월 일본의 핵심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기에 비해 0.8% 떨어져 40개월 연속 하락하는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아시아의 디플레 확산 우려에 대해서는 중국 책임론이 거론되고 있다. 리먼 브러더스는 중국의 값싼 수출상품 가격이 아시아 각국의 디플레이션을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경우 중국 제품의 수입과 국내 수요 부진이 겹쳐 상황이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관리들이 틈만 나면 중국에 대해 위안화 평가절상을 주문하는 것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사진설명>
9일(현지시간) 시카고 상품거래소에서 유로화 가치가 사상 최고치인 1.15달러 이상으로 치솟자 한 외환딜러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 6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디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발언을 한 뒤 달러는 더욱 약세를 보이고 있다. [시카고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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