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깊이보기 : 과거사 청산-세계 사례의 교훈

'과거사 청산' 대표적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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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나치 독일에서 해방된 뒤 프랑스 사회에서는 대독(對獨) 부역지식인의 청산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사회참여적 지식인의 전통, 지식인과 지적 저작물이 지닌 정신적 파급력 등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문화계에서 부역지식인 처벌의 목소리가 강하게 울리도록 했다. 특히 지식인의 책임의식을 둘러싸고 지식인 사회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알베르 카뮈와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각각 처벌론과 관용론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논쟁을 주도하였다.

물론 그 어느 쪽도 지식인의 역할에 내재된 윤리적 책임은 부인하지 않았다. 다만 카뮈와 모리아크를 첨예하게 대립시킨 요인은 책임의 정도, 책임을 느껴야 할 대상과 분야에서의 차이점이었다. 따라서 논쟁의 초점은 과연 부역행위를 이유로 지식인을 사형 등 중형에 처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문제였다.

'콩바(전투)'지에 시평을 기고하던 카뮈는 "청산작업에 실패한 나라는 결국 스스로의 쇄신에 실패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로써 처벌론의 기수가 되었다.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 가브리엘 마르셀 등도 청산론 진영에 섰다. 이에 맞서 '르피가로'지에서 활동하던 모리아크는 프랑스 국민을 저항운동가와 부역자로 나누는 이분법적 청산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고, 기독교적 사랑과 자비를 호소함으로써 전 프랑스인의 화합을 강조하였다. 그는 단 한 명일지라도 무고한 사람이 청산의 희생자가 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격앙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진행 중이던 숙청작업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논쟁 초기에는 물론 엄중한 처벌을 강조한 카뮈의 주장이 광범위한 설득력을 얻었다. 관용과 화합을 옹호한 모리아크는 레지스탕스 진영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고, 그에게는 무조건적인 자비를 강조했던 기독교 성인인 '성 프란체스코'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숙청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들로 인해 지식인의 책임 논쟁은 곧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청산론을 이끌던 카뮈의 태도변화는 이 논쟁의 향방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카뮈는 부역자 재판이 한창이던 1945년 1월에 "우리는 모리아크가 옳았음을 알게 된다"고 인정하면서 강경하던 기존의 입장을 누그러뜨렸다. 과거사 청산이 형평성을 잃고 개인적인 보복의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에서 환멸을 느낀 카뮈는 같은 해 8월에는 "이제 프랑스에서 숙청작업은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신뢰를 잃었음이 명백하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관용론이 여론의 주류를 형성하였고 지식인 책임 논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를 떠나 이 논쟁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문제에 직면하여 분열과 대립을 겪었던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확고한 소신으로 소수의견을 대변한 모리아크나 자신의 주장이 지닌 한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카뮈의 태도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이 논쟁을 독단과 극한 대립에서 구해내었기 때문이다.

유진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