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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한 방'에 가더라 … 기업들 이미지 관리 고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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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위기 때에는 모든 것을 벗어놓고 신속하게 내려가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대한항공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17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 수요사장단 회의’에서 강연을 한 윤호일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극지기후변화연구부장(박사)은 ‘땅콩 회항’ 사태가 불러온 대한항공의 평판 악화에 대해 이렇게 분석했다.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이 완장 5개 중 2개만 내려놓으면서 스스로 위기를 좌초했다”는 것이다. 사건 대응에 대한 처음의 판단 착오가 여론 악화를 불러왔고, 기업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전체 기업의 위기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평판 리스크’(Reputation Risk) 관리가 기업의 핵심 경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평판 리스크란 부정적 여론으로 시장에서 신뢰를 상실해 발생하는 위험을 의미한다. 특히 ‘땅콩 회항’ 사건으로 대한항공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확산하면서 기업들은 더욱 평판 리스크 관리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예측 어려워 … 매출·주가 떨어지고 사업도 흔들

 사실 ‘땅콩 회항’같은 ‘갑의 횡포’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터넷·스마트폰·SNS 등의 발전으로 각종 소문이 ‘빛의 속도’로 전파되면서 임직원 한 명만 잘못해도 대응할 틈도 없이 기업 이미지 전체가 타격을 받는다. 수년간 사회공헌·자원봉사 등으로 쌓은 기업 이미지가 ‘한 방’에 날아간다는 의미다.

 평판 관리 전문기업 맥신코리아 한승범 대표는 “아무리 재무구조가 탄탄한 기업이더라도 나쁜 평판이 지속되거나 도덕성 문제가 불거지면, 실적이 나빠지고 브랜드가치가 하락하는 등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처럼 최근 평판 리스크로 곤욕을 치른 곳이 KB금융지주다. 올 초부터 KB국민카드 정보유출 사건에 이어 국민은행 도쿄지점 부실대출 사건, KT ENS 대출사기 등 악재가 이어졌다. 여기에 임영록 KB금융지주 전 회장과 이건호 전 국민은행장 간의 내분까지 불거지면서 고객의 신뢰가 땅에 떨어졌다.

 문제는 단순히 이미지 실추에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소비자 불매운동이 거세지고, 점유율이 하락해 상반기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 제빵업계 회장이 호텔 지배인을 장지갑으로 폭행해 비난여론이 일자 거래처에서는 납품을 받지 않겠다고 통보했고, 그 회장은 결국 해당 사업을 접었다. 대한항공 역시 겨울 휴가철 성수기를 앞두고 예약률이 떨어졌고, 주가 흐름도 경쟁사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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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평판 리스크는 국내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우즈베키스탄의 목화 전체 생산량의 5% 정도를 구매해왔다. 그런데 이 목화는 정부가 어린이들을 강제 동원해 생산한 것이어서 그간 논란을 낳았다. 대우인터내셔널이 직접 생산에 관여하진 않았지만 국내외 인권단체는 이를 문제삼았고, 여론이 악화되자 나이키는 대우인터내셔널과 거래를 중단하기도 했다.

 기업들은 제품 개발에서부터 자금조달, 경쟁사의 공세, 상품 판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리스크를 만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운 게 평판 리스크다. 다른 리스크는 사전 예측이나 대처가 어느정도 가능하지만 평판 리스크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특히 대한항공처럼 초기 대응을 어설프게 했다간 리스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곤 한다.

 이런 평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기업들이 신경쓰고 있는 게 ‘온라인 소통’이다. 갈수록 SNS의 여론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점을 고려했다. 현대차그룹은 올들어 ‘온라인 소통 강화 3개년 계획’을 마련해 추진 중이다. 일종의 SNS대응팀인 콘텐트편집국을 두고, 국내 그룹사 가운데 가장 많은 10개의 SNS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LG·SK그룹도 전담 운영 인력을 두고 SNS를 통한 온라인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만으로는 평판 리스크를 막기에 한계가 있다. 이른바 ‘라면 상무’, ‘빵 회장’ 같은 사건은 일회성 돌발행동이 SNS를 통해 확산한 것이기에 온라인 대응이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땅콩 회항’ 사건 등은 일회성이라기보다는 그간 누적되어온 구조적인 문제가 폭발한 것으로 봐야한다. 이장우(한국경영학회장) 경북대 경영학부 교수는 “온라인 평판 관리는 부정적 여론을 완화하는 데 효과를 보지만, 리스크 이슈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힘들다”며 “먼저 잘못된 기업 구조와 내부 문화를 바로잡은 뒤에야 평판 리스크 관리가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이에 주요 기업들은 준법경영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윤리경영 매뉴얼을 만들어 평판 리스크를 줄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해외 사업장에 대한 행동 규범을 만들고, 직원의 사원증·SNS 관리에 나서는 것도 비슷한 취지다.

 지난 10월 SK텔레콤 서울 을지로 ‘T타워’ 사옥에는 새로운 입간판이 들어섰다. ‘ID카드는 T타워에서 T나게, 밖에서는 T 안 나게’라는 내용이다. 회사 바깥에서는 목에거는 사원증을 빼고 다니라는 얘기다. 사원증을 찬 직원이 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거나, 술집에서 소란을 피우는 등 좋지 않은 행동을 할 경우 회사 전체의 이미지가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 조치다. SK텔레콤 관계자는 “개인적인 행동·표현이더라도 회사 전체의 목소리로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신경써 줄 것을 당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돈을 맡기는 고객의 신뢰를 바탕으로 장사를 하는 금융회사는 평판 리스크가 존립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기업은행은 ‘평판리스크협의회’, 우리은행은 ‘참금융추진팀’을 만들어 관리 중이다.

홍정효 경남대 경영학부 교수는 “조직의 리더를 중심으로 전사적인 관점에서 평판 리스크 관리에 힘을 쏟아야한다”며 “일단 사고가 터지면 컨트롤타워를 구축하고, 여론으로부터 진정성을 얻을 수 있도록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내놓아야한다”고 조언했다.

마텔처럼 적극 대처 땐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도

 2007년 세계적인 완구회사 마텔의 대규모 리콜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에서 생산한 장난감에서 기준치 이상의 납 성분이 검출되자 마텔의 판매는 급감하고 주가도 폭락했다. 그러나 마텔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안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해 8월2일부터 9월5일까지 한 달간 세 차례에 걸쳐 리콜을 실시했고, 유명 포털 사이트에 리콜 제품 사진을 올리며 반성의 모습을 보였다. 로버트 에커트 마텔 최고경영자(CEO)는 “네 명의 아이를 가진 아빠로서 어떤 작은 문제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해 4분기 마텔의 순이익은 전년도에 비해 15% 늘었다. 효율적인 평판 리스크 관리가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만든 셈이다.

 한국에선 지난 2월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 당시 이웅열 코오롱 회장이 사고 발생 직후부터 현장에 머물며 수습 작업을 진두 지휘한 것을 훌륭한 평판 리스크 관리의 사례로 꼽는다.

장동한 건국대 상경대 교수는 “평판 리스크에 대한 사전 대비와 훈련, 사고 발생시 빠르고 진심어린 사과, 그리고 대외 커뮤니케이션 창구의 일원화가 이뤄져야한다”며 “이제 리스크 관리는 지속가능경영의 필수 요건이 됐다”고 말했다.

손해용·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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