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기획] 수다, 돈 안드는 에이스 영업사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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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방 다이어트로 유명한 L한의원. 2년 전만 해도 서울 변두리 아파트 단지 내 상가에 세들어 있던 그저 그런 ‘동네 한의원’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수다 9단’의 손님이 찾아오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그 손님은 “3개월 만에 몇 ㎏을 뺐다”는 자랑스런 전적을 이웃과 친척·친구들에게 마구 떠들고 다녔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이웃 동네에서, 얼마 후에는 서울 전역에서, 또 얼마가 지나자 전국 각지에서 표준 체중을 웃도는 사람들이 L한의원으로 몰려들었다. 1년여 만에 이 한의원은 신촌 한복판에 본원보다 몇 배 큰 분원을 열었다. 전단지 한번 뿌린 적이 없는데도 한 달 이상 예약 환자가 밀려 있는 대박 한의원이 됐다.

#2 에스프레소 커피 제조기로 유명한 K사. 한 TV 방송에서 프로그램 제작에 필요하다고 해서 에스프레소 기계 한 대를 빌려줬다. 방송을 타서 얻을 수 있는 광고 효과를 은근히 기대했는데 정작 대박은 다른 곳에서 터졌다. 방송을 하면서 K기계로 뽑은 에스프레소 맛에 반한 모델 변정수씨가 그 자리에서 기계 한 대를 구입했다. 역시 ‘한 수다’하는 정수씨는 만나는 동료 연예인들에게 에스프레소 자랑을 했고 순식간에 온 방송가에 소문이 퍼졌다. K기계는 한 대에 2백10만원이나 하는 고가에도 불구, 한 달 만에 10여 대가 팔렸다. 능력있는 영업사원 한 명의 평균 판매량을 넘는 실적이었다.

디카블로그 등 통해 화제 오르면 금세 퍼져

이쯤 되면 이른바 '입소문 마케팅'이 단순한 구전(口傳) 효과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업들이 그걸 모를 리 있겠나. 요즘 기업들은 국내건 외국이건 '입소문 전쟁' 중이다. 특히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과 블로그의 활성화로 개인 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입소문은 제품 광고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미국의 종합생활용품업체 P&G는 이미 2001년 입소문 마케팅 전담 자회사인 트레머를 설립했다. 트레머는 사업 내용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다가 지난해 경제전문지 포브스에 커버스토리로 실리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이 회사는 입소문 전파를 위해 30만 명에 달하는 청소년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으며 현재 주부 대상으로까지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초기에 자사 제품만 입소문 마케팅을 펼쳤으나 현재는 코카콜라.소니.도요타.드림웍스 등 외부 고객사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국내 입소문 마케팅 역시 치열하다. 입소문 마케팅 전문회사까지 등장할 정도다. 2003년 출범한 콜레오마케팅그룹은 현재 이랜드.빙그레.LG생활건강.한국스마트카드 등 10여 개 기업을 위해 입소문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이 회사의 이주형 마케팅실장은 "그 밖에도 입소문 마케팅 특성상 밝힐 수 없는 비공개 프로젝트가 상당수 진행 중"이라며 "공동체 성향이 강하고 인터넷이 많이 보급된 한국에서 입소문 마케팅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입소문 마케팅 하면 이른바 '알바'들에 의한 여론 조작 행위 등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입소문 마케팅은 소비자들 사이에 급속히 퍼질 만한 광고 문구를 주입하는 바이럴(viral) 마케팅이나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이벤트를 벌이는 버즈(buzz) 마케팅과는 다르다. 바이럴 마케팅의 대표적 성공사례는 메일을 보낼 때마다 "핫메일로 무료 이메일을 보내세요"라는 문구가 나타나는 핫메일이며 버즈 마케팅은 최근 거리나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차림으로 벌이는 이벤트 등을 일컫는다. 그러나 오늘날 소비자들은 과거처럼 느리고 정확하지 않은 소문이나 소란하기만 한 이벤트 행사로 인해 구매 의사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입소문 마케팅 전문회사 버즈에이전트의 데이브 몰터는 "입소문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브랜드 전도사'가 될 때 비로소 발생한다"고 단언한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일은 소비자들 사이에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긍정적' 입소문은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자신의 경험이나 의견.열정을 나눌 때 널리 퍼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품질이 뒷받침돼야만 입소문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국내에서 이러한 입소문에 의한 가장 큰 성공 사례는 김치냉장고 딤채와 삼성르노자동차 SM5라는 데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다. 강남 지역 주부를 대상으로 '고객 체험단' 형태로 진행된 딤채의 전략은 이미 입소문 마케팅의 고전이 됐고, SM5는 택시 기사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이러한 사례들은 TV에서 광고가 나오면 바로 채널을 바꾸면서도 이웃의 말 한마디엔 귀를 쫑긋 세우는 오늘날 소비자들의 소비 행태를 제대로 읽은 경우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퍼미션 마케팅'의 저자인 세스 고딘은 이미 'TV-산업 복합체'의 죽음을 선언했다. 소비자들이 그만큼 TV 광고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대신 유무선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 새로운 네크워크로 무장한 '입'들이 그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훈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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