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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 미끼로 8억7000만원 사기…전직 은행지점장, 왜 사기범이 되었나

중앙일보

입력

투자 전문가를 사칭해 20대 여성들을 상대로 대출을 받게 한 뒤 투자금 명목으로 수억원을 가로챈 사기단이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이들 중 한 명은 전직 농협 지소장 출신이었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유령회사를 차려놓고 20대 여성들을 비서로 채용해 거액을 뜯어낸 혐의(사기)로 백모(32)씨와 박모(50)씨를 구속하고 배모(27ㆍ여)씨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17일 밝혔다.

백씨와 박씨는 지난해 4월 14일부터 올해 9월 18일까지 서울, 인천, 경북 등을 돌며 25명에게 8억7000만원을 받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박씨는 지방 농협 지소장 출신으로 2005년 청와대 비자금 사기단에 연루돼 66조 원을 송금하다 실형을 산 후 사기전과 8범의 ‘상습범’이 됐다. 박씨가 사기 범죄를 상습적으로 저지르게 된 이유는 뭘까. 박씨가 2006년 경제 주간지인 이코노미스트에 쓴 수기를 참고하면 사연은 이렇다.

농협에서 22년 동안 일한 박씨는 2005년 경북 안동 풍천농협 구담지소장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사업과 주식투자 등에 실패하며 9000만 원의 빚을 지며 그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몸이 약한 둘째 아들의 병원 치료비 등으로 가정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박씨는 마지막 방법으로 명예퇴직을 신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박씨에게 ‘청와대 비자금 해결팀’의 일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조모씨가 접근해왔다. 이들은 “금융실명제 도입 이후 잠자고 있는 계좌의 돈을 모아 이체해 국정 자금으로 사용하게 해주면, 거액의 수수료와 재경부의 고위직 자리도 주겠다”고 말했다. 서울 한남동 고급주택에서 청와대의 봉황 직인이 찍힌 통장을 들이밀던 이들의 제안은 너무나 달콤했다. 박씨는 수기에서 이들의 제안을 ‘희망의 손길’이라고 표현했다.

자칭 '청와대비자금 회수팀' 소속이라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인 박씨는 설 연휴 하루 전인 2005년 2월 7일, 미리 지정된 계좌로 66조 원을 송금했다. 자신이 관리하던 농협 내부 전산망 접근용 단말기 카드를 이용했다. 송금은 1회 한도인 2조 원씩 총 3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그때마다 송금 담당 직원은 미리 심부름을 보냈다. 애초 90조원을 송금하기로 했지만 그나마 박씨의 거액 이체를 수상히 여긴 전임 지소장의 전화로 66조 원만 송금할 수 있었다.

돈을 송금한 박씨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청와대 비자금 회수팀 일당이 별도로 벌인 7조 원대 금융사기가 경찰에 덜미를 잡히며 박씨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씨에게 이체받은 66조 원을 다른 계좌로 이체하려던 차모씨 등이 잡히면서 박씨 역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됐다. 박씨는 결국 강남의 한 찜질방에서 검거됐다. 박씨에게 희망의 손길이었던 청와대비자금 회수팀은 시중 은행 임직원들을 포섭해 73조 원이라는 거액을 인출하려 했던 전문사기단이었던 것이다.

박씨는 수기에서 “사기꾼에 속은 나는 바보 멍청이였다. 사기꾼들에게 당하고 나서야 내가 부린 과욕 덕분에 어리석은 범죄에 휘말려 직장까지 잃고 전과자가 됐다”고 적었다.

하지만 박씨는 1년의 형을 마친 후 이번에는 자신 스스로가 사기범으로 전락하게 됐다. 은행원 경력을 살려 주식투자 등을 제안한 후 돈을 가로채는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이렇게 그는 전과 8범이라는 전문 사기꾼 대열에 들어서게 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번 사건으로 검거된 또 다른 주범 백씨와 박씨가 만난 것도 교도소에 있을 때였다. 2010년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출소 후 범행을 모의했다. 백씨 역시 사기 전과 7범의 상습범이었다.

이들은 구치소에서 모의한 대로 출소 후 레인보우인베스트먼트, JMM에셋 등의 투자전문회사를 빙자한 유령회사를 차린 후 인터넷 사이트에 아르바이트 모집 광고를 내 여직원을 모집했다. 경찰관계자는 "사무실을 임대해 '정 사장' 등으로 호칭하며 외제차를 몰고 다녔다"며 "강남의 노래방에서 남성도우미들을 불러 여직원들과 함께 놀게 해주는 등 실제 투자회사 임원인 것처럼 행세했다”고 말했다.

채용한 지 한 달 정도 지나 경계심이 풀리기 시작하면 직원들에게 투자를 권유했다.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 투자를 하면 이익금을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주변에 대출을 받은 지인들이 있는지도 빼놓지 않고 물었다. “‘통대환 대출’을 통해 대출금도 갚아주고 이익금도 주겠다”고 속였다. 통대환 대출은 고금리 대출을 대신 갚아줘 신용등급을 올린 뒤 시중 은행에서 이보다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아 대출원금과 알선수수료 등을 받아 챙기는 방법이다.

투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은 이들은 처음 한두 달은 이익금이라며 일정액을 투자자에게 돌려주다 잠적했다. 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피해자 명의를 빌려 새 법인을 차리는 수법을 사용해 가며 서울, 경기 인천, 경북 경산 등에서 25명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였다. 피해자는 모두 20대로 이중 24명은 여성이었다. 대부분 학자금, 성형비용 등으로 대출을 끼고 있었다. 경찰관계자는 “신용등급을 올리기 위해서는 신용카드를 자주 써야 한다”며 피해자들의 신용카드를 빌려 사용하기도 했고, 여대생에게 사귀자고 한 후 1800만 원을 뜯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범인 배씨는 2009년 인천에서 백씨에게 5000만 원을 떼인 사기 피해자였다. 하지만 배씨 역시 박씨를 신고하는 대신 다른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모집하는 등 범행에 가담했다. 범행에 협조하면 내심 백씨에게 떼인 돈 5000만 원을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경찰관계자는 “이들은 피해자에게 받은 돈 대부분을 유흥비, 채무 변제로 사용했다”며 “추가 피해자 여부를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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