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아프간 공격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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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나의 다음번 결정은 아이오와 주민들에게 더욱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소련에의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취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른 경제적 조치들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겠지만 곡물 수출 제한은 소련 경제에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제재라는 것이 분석 결과였다.
소련은 곡물이 매우 부족했고 공급원이 될만한 나라들은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아르헨티나 뿐이었다. 금수 조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농민들은 물론 이들 외국 곡물 생산자들의 협조도 필요했다.
그러한 조치는 극단적인 것이었을 뿐 아니라 나로서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은 국내 시장 가격 안정을 위해 연거푸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취했으나 나는 76년 선거전에서 우리의 국가 안보가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그런 짓은 하지 않겠노라고 공약 한 바 있다.
당시 몇몇 경작자들이 나의 발언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곡물의 자유 시장 체제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나 자신 한 농부로서 정부 보상 없이 막대한 곡물 판매가 취소된다면 미국 농민들이 심각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곡물 재고는 산적되어 가격은 폭락을 면치 못하게 된다. 곡물 금수 조치가 취해지면 그 같은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소련에의 곡물 판매는 내가 해결해야 할 가장 민감한 문제였다.
­우리는 80년 올림픽에 관해 긴 토의를 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회의적이며 참가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성명을 내기로 했다. 이 문제는 나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였으며 소련 측에도 가장 가혹한 타격이 될 것이다.

<곡물 금수엔 어려움도>
단지 많은 나라들이 공동 보조를 취해준다면 좋은 방안이 되리라고 본다. <일기 1980년1월2일>
소련 입장으로서는 모스크바 올림픽은 스포츠 행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미국을 포함한 1백여개국 이상의 나라가 참여하고 수천의 사업체·매스컴사들이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런 준비들을 방해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조치가 될 것이었다.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제2단계 전략 무기 제한 협정 (SALTⅡ)을 유산시키는 것도 중요한 대응책이 될 수 있었다.
1윌4일 하오 보좌관과 각료, 「먼데일」 부통령, 「톰·워트슨」 주소 대사, 의회 지도자에게 나의 대소 곡물 금수 결정을 통고했다. 「먼데일」은 미국 농민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우려하여 곡물 수출 제한은 반대했다.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는 미국의 요청대로 소련에 곡물 수출을 하지 않겠다고 동의했다. 아르헨티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약속했으나 곡물 수확기가 되자 마음을 바꾸어 소련이 제시한 높은 가격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으나 그들은 팔 수 있는 곡물이 많지는 않았다.
모든 나라들이 내 마음처럼 소련의 침공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인디라·간디」가 재선됐을 때 그녀에게 축전을 보내면서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해 우리에게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반응은 냉담했다.
며칠 후 유엔 총회에서 인도 대표는 소련의 행동을 강력히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쿠바는 한술 더 떠 소련을 격찬했다.

<소, 종전 주장 되풀이>
쿠바는 당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가입을 노리고 있었으나 소련에 대한 지지 발언으로 후원자를 잃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쿠바는 이때 또 한편으로 NAM (비동맹 운동) 회의를 주최하도록 되어 있었다. 인도·유고·이집트 등에 의해 창설된 이 운동의 참뜻을 소련의 꼭두각시인 쿠바가 잊어버린 채 소련을 두둔했기 때문에 회원국들을 화나게 만들었고 「카스트로」 도열이 올라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전갈을 보내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문제를 협의하자고 했다. 나는 국가 안보 회의의 라틴아메리카 전문가인 「로버트·패스토」와 국무성의 「피터·태노프」 차관보를 쿠바로 보내 「카스트로」와 비밀 협상을 갖도록 지시했다.
­우리의 밀사들은 「카스트로」와 11시간에 걸친 논의 끝에 놀랍게도 분명한 결과를 보고해왔다. 「카스트로」는 주저 없이 소련과의 사이에서 빚어지고 있는 문제들을 털어놓았다. 그는 미국이 유엔에서 한 방해 공작 때문에 깊이 상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과 좀더 나은 관계를 갖도록 원했으나 그가 혁명을 일으키는데 결정적으로 후원해준 친구인 소련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일기 1980년1월18일>
1월20일 기자 회견에서 나는 모스크바 올림픽에 대한 미국의 결정을 발표했다.
미국은 소련이 한 달 안에 그들의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철수시키지 않으면 올림픽에 불참하겠다는 메시지를 올림픽 위원회에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아프가니스탄 사태와 관련하여 당시 여론의 초점이 됐던 문제였다. 결정을 내리기까지 나는 수많은 국가 지도자들, 체육계 인사들과 논의를 거듭했다. 나는 올림픽 운동 정신을 저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피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한 그들의 손님으로 참여한다는 것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딜레머가 소련이 그들의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해결되기를 바랐으나 「도브리닌」 대사는 종전의 똑같은 답변만을 되풀이 할뿐 모스크바로부터 어떤 다른 소식도 갖고 오지 않았다.
나는 올림픽에 관한 앞서의 결정과 함께 개최지를 바꾼다면 기꺼이 참여 할 것은 물론 장소 변경에 따른 경비와 사후 정리 문제도 떠맡겠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이 참가하고 미국만이 홀로 남는다 하더라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국민을 괴롭히는 한 미국 선수들은 모스크바에 가서는 안 된다고 천명했다.
또 다른 결정은 1월23일 발표됐다. 그것은 소련이 페르시아만 지역에 대한 더 이상의 위협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하나의 경고였다.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즉 페르시아만 지역을 장악하려는 어떤 외부 세력의 기도도 미국의 이익에 대한 도전으로 보며 그러한 도전에는 군사적 행동을 포함한 적절한 보복이 따를 것이다.』

<인, 협조 요청에 냉담>
이 같은 성명은 쉽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미국의 모든 힘을 다해 이 성명을 실천할 각오가 돼 있었다. 소련과는 79년에 페르시아만 문제를 논의한 바 있었지만 그들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나는 미국의 결의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한 것이었다.
언론들은 이 성명을 「카터·독트린」이라고 표현했고 소련이 이란을 공격하더라도 미국이 이란 침공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없기 때문에 어리석은 위협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성명은 심사 숙고 끝에 나온 것이며 소련의 침략으로 점령 당한 조그마한 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세계가 일치 단결된 행동으로 지지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소련이 이웃 페르시아만 지역으로 지배를 확대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곳은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나라에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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