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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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정 중에서 부모님의 정보다 더 높고 깊고 따스한것은 없다.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으로부터 받는 정도 작은 것은 아니지만 이를 부모님이 베푸신 정에 비할수는 없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읽다보면 경세가이자 경학자요 선각자이자 시인으로서의다산과 인간 다산, 아버지로서의 다산을 함께 만나게된다. 6남3녀를 두었으나 4남2녀가 요절하여 참척(참척) 술픔을 겪어야 했던 다산은 여섯 자녀를 잃은 단장의 부정을 시와 광명(광명)으로 지어 어린 영혼들을 위로하며 애통해했던 아버지였다.
18년간의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던 다산은 기회있을 때마다 고향으로 편지를 보내어 자녀들을 가르쳤고, 때로는 유형의 땅으로 불러 직접 교육시키기도 했다. 가문이 비록 망하여 폐족이 되었으나 노력여하에 따라서 성인이 될수 있고, 문장가도 될 수 있으며 통식달리한 선비도 될 수있다고 가르쳤다.
강진으로 유배된지 4년째 되는 겨울, 큰아들 학연이가 찾아왔을때 쓴 시(학가휴지뢰은산방유작) 한 수만을 보더라도 다산의 부정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동안 자라서 듬성듬성 수염까지 난 장성한 아들을 보고 <너의 생각 사오년에 항상꿈속에서 보았노라>고 하여 혈육을 그리던 부정을 토로한다.
마늘 농사가 잘되어 이를 팔아 노자로 삼아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처절한 비애를 느끼며 더 이상 향리의 소식을 물을 수 없었던 아버지였다.

<유배객에게 식구 하나 늘었으나 내힘으로는 밥을 구할길 없네 손잡고 산으로 올라갔으나 너와 나 어디로 가야하는가?>라고 하며, 아들이 찾아온 기쁨보다는 음식과 거처를 해결할 수 없는 가슴아픈 부정을 형상화했다.

<기구하게 산사에 이르러 밥을 구걸하는 안색 비굴하기만 하네 요행히 작은방 빌어서 예불 알리는 종소리 함께 들었노라.>
보은산방에 가서 밥을 빌어야했던 다산은 우선 먹는 문제가 해결되자 그 다음으로 아들에게 『주역』과 『예기』를 가르치며 내일을 준비한 아버지였다.

<인생은 약한 풀과 같은것 나는 쇠약한 몸이 되었노라 풀위에 맺힌 이슬인양 해뜨면 마르나니 이 내뜻 아는자 누구인가? 너에게 주역과 예기를 가르쳐줄 터이니 고향에 돌아가 네 아우의 스승이 되거라>하 며 다산은 정깊은 심층의 언어를 토로했다.
귀양객이 겪는 만단의 비애를 초극하며 미래를 위해 아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배운 후에 고향에 돌아가 아우의 스승이 되길 염원했던 다산.
유배라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아들을 가르치며 미래를 기약했던 다산의부정은 오늘을 사는 모든 아버지의 정과 비록 양상은 다를지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다산의 부정이 내재된 한편의 시는 효의 윤리가 퇴색한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따스하고 깊고 넓은 부정의 세계를 다시 한번 조용히 느끼게한다. 복잡한 사회생활 속에서 맺어지는 작은 정에 집착하여 본말을 전도한채 지고 지대한 부정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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