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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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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이호민은 연안이씨가 자랑하는 외교의 명수.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으로 명나라의원병을 끌어들이는데 공을 세웠으며 그후 부제학에 올라 대명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등 탁월한 외교솜씨를 발휘했다. 전란이 끝난후 대제학·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연안이씨는 선조조에 이르러 대문장 이정구와 권신 이귀를 배출하면서 찬란한 개화의 꽃을 피운다. 이정구는 우리 역사상 손꼽는 한문학의 대가. 그는 선조 때 대제학을 거쳐 인조 때 좌의정에까지 올랐으며 멀리 명나라에 까지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또 그의 집안에서는 「3대대제학」을 배출, 가문을 빛냈다.
즉 그의 아들 이명한이 인조 때 대제학욜을 이명한의 맏아들 이일상이 효종 때 대제학을 역임해 「정구 명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3대 대제학을 배출한 것이다. 역사상 3대 대제학을 지낸 집안은 광산김씨 (사계김장생집), 달성서씨(약봉서준집), 전주이씨(백강집)등 4집뿐으로 이것이 연안이씨의 긍지와 자부심의 원천.
이귀는 학자의 가문인 연안이씨의 번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 명실공히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었다. 그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명조·이조판서등을 역임한 당대의 세도가였다. 효종 때 영의정에 오른 이시백은 그의 아들이다. 이귀의 집안은 「9대봉군」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영조 때 좌의정으로 사도세자의 스승이었던 이위, 같은 시기에 영의저을 지낸 이천보는「사도세자의 평양원유사건」에 책임을 지고 음독자결한 충신들이다.
이 사건은 세자가 왕의 허가도 없이 평양에까지 다녀온 사건으로 영조가 세자를 버리는데 극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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