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여자 30% 됐으면 금융위기 안 왔을 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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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미국 월스트리트에 여자가 30%만 됐어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오지 않았을 걸요. 위기가 오기 전에 문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요?”

 이번 펀드 매니저 평가에서 수익률 1위를 한 박인희 신영자산운용 매니저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주식시장은 흔히 거친 전쟁터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에 비유된다. 장이 열리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경쟁자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변화를 읽고, 주식을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아야 수익을 낼 수 있다. 도망가거나 변명할 여지는 없다. 수익률이 모든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펀드 매니저를 ‘무사(武士)’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친 싸움을 버틸 수 있는 남자들이 더 잘할거라는 편견이 많았다.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실력을 입증한 여성 매니저들의 비결은 섬세함과 끈기다. 박 팀장은 “최근 CJ E&M 실적유출 사건 등으로 정보와 친분에 의존해서 수익을 내던 매니저들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인맥에 의지하기보다는 차분하고 끈기 있게 시장을 분석하는 여성 매니저들이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셈”이라고 설명했다. 안선영 미래에셋자산운용 본부장은 균형감을 꼽았다. 그는 “글로벌 자산배분을 하다 보면 헬스케어·소비재·고령화·공유경제 등 새로운 변화를 읽는 눈이 필요한데 이런 일상생활 속 ‘소프트 트렌드’를 읽고 위험(리스크)을 분석하는 데는 여성이 강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요할 땐 과감할 줄도 알아야 한다. 민수아 삼성자산운용 본부장은 2011년 여름 본인이 운용하던 삼성 중소형 포커스 펀드 판매를 중단했다. 2010년 20%가 넘는 수익률을 기록하면서 이듬해 돈이 한꺼번에 몰렸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낸 운용보수로 수익을 내는 운용사 입장에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운용철학을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대한민국 모든 ‘직장맘’이 그렇듯 여성 매니저의 공통된 고민은 육아다. 이들은 좋은 엄마이자 훌륭한 매니저라는 1인 2역을 해내야 한다. 민 본부장은 “출산 사흘 전까지 출근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는데 정작 아이를 낳고 나서가 더 힘들더라. 책임감에 하루 4시간 이상 자 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이한길 기자

◆어떻게 선정했나

금융정보 제공업체 에프앤가이드가 10월 1일 기준 한국 펀드매니저의 3년 수익률을 분석했다. 대상은 금융투자협회가 공시한 599명의 공모펀드 매니저다. 이번 분석에선 3년 동안 이직 등으로 운용 공백기간이 7개월 이상, 운용 규모가 100억원 미만인 펀드매니저는 제외했다. 이 조건에 해당한 115명 펀드매니저 중 벤치마크보다 3년 수익률이 높은 펀드매니저 30명을 뽑았다. 이번에 기준으로 삼은 벤치마크는 배당수익률을 포함한 3년 코스피 상승률(16%)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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