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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잘 굴린 펀드매니저, 톱10 중 여성이 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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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2004년 6월 박인희(38) 신영자산운용 펀드매니저는 임신 9개월의 만삭이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공인재무분석사(CFA) 3차 시험을 치렀다. 주변에선 “독하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박씨는 “배가 부르니까 책상이 멀고 좁았다”며 “시험 보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조선업종 담당이었는데 애를 안고 자다가도 조선주가 폭등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에 둘째 아이를 낳고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휴가 중에도 재택 근무를 하며 마라톤 펀드의 포트폴리오를 조정했다. 장기투자하는 펀드여서 수시로 주식을 사고 팔 필요가 없고, 대신 업무를 할 직원도 있었지만 억척스럽게 일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업무시간이 긴 것을 아주 싫어한다”며 “후배가 야근을 하면 인생의 황금기에 왜 그러고 있느냐며 퇴근을 종용한다”고 했다. 이런 일에 대한 열정 덕에 그는 국내 펀드매니저 가운데 수익률이 가장 높은 스타 펀드매니저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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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아줌마의 억척스러움과 여성의 섬세함을 겸비한 여성 펀드매니저가 국내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다. 여성이 최상위 수익률 펀드매니저 자리를 휩쓰는가 하면 여성 펀드매니저의 수도 크게 늘고 있다.

 9일 본지가 에프엔가이드와 함께 국내에서 처음으로 펀드매니저 599명의 수익률(10월 1일 기준)을 분석한 결과 상위 10위 안에 여성 펀드매니저 4명이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펀드매니저 가운데 여성 비율이 12%(71명)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여성 펀드매니저의 활약이 두드러진 셈이다. 그동안 자산운용사별 수익률을 분석한 사례는 많았으나 개별 펀드매니저의 성적표를 매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분석에선 599명 가운데 100억원 이상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 115명을 추리고 이들 중 벤치마크보다 3년 수익률이 높은 펀드매니저를 뽑아 순위를 매겼다. 벤치마크는 배당수익률을 포함한 코스피 상승률로 이번에 기준으로 삼은 3년 벤치마크는 16%다. 박인희 신영자산운용 펀드매니저가 3년 동안 벤치마크보다 54.5%의 수익을 더 올려 1위에 올랐고 김화진(3위, 41.9%, 신영자산운용), 민수아(6위, 30.4%, 삼성자산운용), 안선영(9위, 27.8%, 미래에셋자산운용) 등 여성 펀드매니저 네 명이 상위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100억원 이상 운용하는 여성 펀드매니저는 9명에 불과하다.

 ‘금융투자업계의 꽃’으로 불리는 국내 펀드매니저 시장은 2000년대만 해도 여성에게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여성이 진입하기 어려워 여성 펀드매니저가 극소수(10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표적인 ‘금녀의 구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여성 인력이 늘어나며 이제는 전체의 12%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여성 펀드매니저가 좋은 실적을 내고 있는 이유로 허남권 신영자산운용 부사장(CIO, 최고투자책임자)은 “여성 인력은 세심한 종목분석, 장기성과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심이 장점”이라며 “시장이 요동칠 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산운용업계에서 여성 펀드매니저가 가장 많은 이 회사는 전체 26명의 펀드매니저 중 9명이 여성이다. 안선영 미래에셋자산운용 본부장은 “저성장·저금리 시대엔 과거처럼 크게 오르고 내리는 종목이 줄어들기 때문에 빠른 매매를 선호하는 남성 펀드매니저가 불리하다” 고 말했다.

 남성으로 수익률 상위 10위에 오른 펀드매니저는 이채원(2위, 42.3%, 한국밸류), 허남권(4위, 33.1%, 신영), 이하윤(5위, 31.1%, 마이다스), 김대환(7위, 29.6%, 신영), 최광욱(8위, 29.5%, 에셋플러스), 최웅필(10위, 27.5%, KB) 등이다. 자산운용사별로는 가치투자를 표방하는 한국밸류, 신영, 에셋플러스가 1, 2, 3위를 차지했다.

염지현·이한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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