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스타 셰프들, 인기 업고 워싱턴 요리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미국의 인기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톱 셰프’에 출연한 미셸 오바마 여사(사진 오른쪽). 미셸의 왼쪽 둘째가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이자 스타 셰프인 톰 콜리키오다. [사진 백악관 홈페이지, 중앙포토]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 집계에서 2500만 달러(약 278억원)의 수입으로 전 세계 셰프 중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버는 레이철 레이(46). 세상 부러울 게 없을 듯한 그가 지난 3월 방송에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토크쇼를 진행하던 중 “내겐 너무도 중요한 문제라서 눈물이 난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언급한 이슈는 자신의 특기인 ‘30분 만에 저녁상 차리기’와는 전혀 무관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 문제였다. 조 바이든 부통령을 영상으로 초대해 당시 야당인 공화당의 반대에 가로막힌 건강보험 개혁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시청자들에게 지지를 요청했다. 그러던 중 오빠가 건강보험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돌이키며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을 지지해 달라”며 눈물을 보인 것이다. 미국 전역 170여 개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인기 토크쇼 진행자가 오바마의 원군을 자청한 셈이다.

 지난 11월 중간선거 참패 전후로 오바마 대통령은 ‘방사능처럼 가까이하기엔 위험한 존재’라는 비아냥까지 들어가며 지지율 하락에 허덕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든든한 버팀목은 레이와 같은 스타 셰프들이다. 미국의 인기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톱 셰프’ 진행자인 스타 셰프 톰 콜리키오(52) 역시 오바마 대통령을 지지하며 셰프들을 정치 세력화하는 움직임을 주도하고 있다. 미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이를 두고 “워싱턴에 셰프 군단이 등장했다”고 진단한다. 셰프들이 주방에서 나와 워싱턴 정가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먹거리 정치(food politics)’가 워싱턴 정계의 새바람이 되고 있다.

 콜리키오가 주축이 된 ‘먹거리 정책 행동(Food Policy Action)’은 워싱턴의 새로운 로비 집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콜리키오는 지난해 이 단체 대표 자격으로 하원에 출석해 가공 식품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저소득층에 유기농 식품 공급을 확산해야 한다는 취지로 연설했다. 지난 2일 하원에 유전자변형식품(GMO) 관련 제재를 강화하는 법안을 상정해 달라는 청원서도 제출했다. 콜리키오는 CNN 등에 출연해 “먹거리는 정파를 초월해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라며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미 전역에서 1만 명 이상의 셰프들이 연합한 조직인 ‘셰프 협력체(Chefs Collaborative)’와 ‘셰프 행동 네트워크(Chef Action Network)’도 워싱턴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존재감을 뚜렷이 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부부를 적극 지지하는 스타 셰프는 캐달 암스트롱(왼쪽 사진), 레이철 레이(가운데 사진)등 다양하다. 호세 안드레스 셰프(오른쪽 사진의 왼쪽)는 오바마 대통령과 막역하다. [사진 백악관 홈페이지, 중앙포토]

 뉴욕타임스(NYT)는 “정치의 영역과는 무관하다고 여겨졌던 셰프들이 먹거리 정책에 적극 개입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고 평했다. 첼리 핑그리(민주당) 하원의원은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셰프들은 건강한 먹거리라는 정책을 원한다는 점에서 당파를 초월하며 모든 유권자에게 호소력을 가진다”며 “여기에다 셰프 특유의 추진력과 스타 파워가 더해져 강력한 정치세력이 됐다”고 말했다. 핑그리 의원의 발언은 ‘셰프 정치’의 위력을 직접 체감한 경험에 기반한다. 지난해 콜리키오를 초청해 워싱턴 자택에서 연 정치 후원금 모금 행사에 예년의 두 배가 넘는 인원이 몰렸다.

 흥미로운 건 셰프들의 대다수가 오바마 정권과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콜리키오는 CNN 인터뷰에서 “처음부터 민주당을 지지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추진하는 유기농 먹거리 확산 등이 민주당 정책과 부합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연결고리는 미셸 오바마 여사의 비만 퇴치 운동인 ‘움직이자(Let’s Move!)’ 캠페인이다. 통곡물과 채소 등 건강 식단을 추구하는 미셸의 캠페인에 콜리키오는 적극 호응했다. 그가 셰프들의 정치 세력화에 관심을 가졌던 2012년엔 자신의 프로그램 ‘톱 셰프’에 미셸을 초청해 비만 퇴치를 위한 요리법을 개발하는 특집까지 마련했다. 그는 최근 학교 급식 예산을 공화당이 감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적극 반대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 역시 ‘셰프 정치’를 활용한다. 중간선거 직전인 지난달 초 스타 셰프 호세 안드레스를 초청해 후원금 모금 만찬을 마련했다. 1석에 1만 달러(약 1115만원)를 매긴 만찬 참가권은 일찌감치 마감됐다. 지난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엔 스페인계 미국인 안드레스를 백악관으로 불러 “이민계 미국인들의 모범”이라며 표창장을 수여했다. 그의 스타 파워도 활용하고 히스패닉의 지지라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렸다. 아일랜드 출신의 스타 셰프 캐달 암스트롱은 “난 오바마 부부의 광팬”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오바마 부부는 2011년 결혼기념일 저녁을 버지니아에 있는 그의 레스토랑 이브에서 보냈다.

 셰프들의 ‘먹거리 정치’에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고 정계를 기웃거린다는 비판이다. 요리 연구가인 줄리 켈리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셰프들이여, 제발 프라이팬과 냄비에 집중하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이들이 주로 추진하는 유기농 먹거리와 균형 식단 관련 정책은 셰프가 아니라 영양사들의 영역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들 세력의 성장세를 꺾기는 역부족이다. 공화당에서도 “셰프들과 유대를 끈끈히 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청원 운동을 펼치기 위해 미 하원을 찾은 콜리키오에게 공화당 의원들은 함께 사진을 찍자고 청하기도 했다. 워싱턴에서 로비스트로 잔뼈가 굵은 인물인 스콧 파버는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셰프들은 내가 겪어본 로비스트들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세다”며 “그들은 실제로 (레스토랑 등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누구나 관심이 있는 먹거리 전문가라는 점에서 신진 정치 세력으로 뿌리내릴 것”이라 내다봤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