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진보당 사건(3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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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죽산이 농민당의 창당에 참여치 않겠다고 한 것은 이대통령과의 거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죽산은 한민당과는 거리가 더 멀었고 내각책임제보다는 대통령중심제를 지지하는 쪽이었다. 따라서 죽산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 무렵의 죽산의 면모를 보여주는 한 사건은 종전운동 그룹과의 접촉이다.
6·25전란 속에서 정부는 북진통일을 추구했다. 북괴가 일으킨 전쟁으로 치르게된 엄청난 희생의 댓가는 통일의 달성-이것은 민족의 비원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 그리고 전쟁확대를 우려하는 미국의 정책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아득한 저 멀리에 있었다. 그럴 때 재야일각에서 종전운동이 일어났다.

<피난 안가고 남아>
이 운동은 북진이라는 정책에 밀려 오랫동안 묻혀져 있던 비화다.
종전운동의 주역이던 박진목씨 (동경서 발행되는 통일일보 부사장)의 회고로 살펴보자.
『52년 봄 부산에서의 일이다. 우리는 종전운동을 대통령께 설명하는 기회를 얻어야 했다. 여러 채널을 두드리다 모두 실패해 마지막으로 국회로 갔다. 나는 신익희회장을 찾았으나 자리에 없어 조봉암부의장실로 갔다. 마침 여러의원들과 환담 중이었다. 그때 내 모습은 초라했다.
까맣게 그을린데다 옷차림도 남루했다. <무슨 일로 오셨소><국가민족을 위해 조용히 드릴 말씀이…><그림 앉으시오><처음 뵙습니다만 이용경씨가 선생님 말씀을 자주 들려주어 저는 선생님을 잘 압니다. 사실은 종전을 위해 평양을 다녀온 일로…>그러자 죽산은 순간 긴장하는 듯 했다. 그리곤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렇게 해서 부의장실에서 우리들의 종전운동 경과를 죽산에게 설명했다』
이제 종전운동의 대강의 과정을 옮겨보자. 최초의 종전운동은 최탄환·박진목씨에 의해 구성된다. 최씨는 일찌기 의친왕과 함께 상해로 가 독립운동에 몸바쳤고 동학의 신봉자로 우파민족진영의 중진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민주의원도 지낸 애국지사다. 박씨는 일제하에서부터 공산당과 연결돼 있었고 8·15후에도 좌익진영에서 활동했으나 50년 초에 경북지역의 민족진영 선배들의 주선으로 전향한 민족주의자.
두 사람은 중공군의 개원으로 두 번째 서울을 철수하게 됐을 때 피란길에 나서지 않고 서울에 남아 북의 책임자와 접촉, 전쟁종식을 호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정부쪽과의 아무런 사전교섭도 없는, 보기에 따라선 무모하기도 한 계획이었다.

<이승엽과 만나>
이리하여 그들은 텅 빈 서울을 지킨다. 중공군이 진입하고 또 한참이 지난 51년1월5일 그들은 소위 서울시 인민위원회 책임자들을 만났다. 그들도 잘 아는 남노당 출신들이었다. 두 사람은 이들에게 노동당 제3비서로서 대남책이던 이승엽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도록 요청한다.
이들 두 사람이 이승엽과 면담한 것은 1월25일. 이승엽은 소위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한지성을 대동하고 있었다. 오랜 얘기 끝에 이승엽은 이렇게 말했다. <두 분은 대한민국 정부와 연결된 것도 아니고 어떤 자격도 없으니 곤란하다. 그렇지만 그 정신만은 알겠다. 김일성과 협의해 보겠다.>
2월중순 이들은 두 번째 회담을 했다. 이승엽은 이렇게 말했다. <종전운동을 원칙면에서 찬성한다. 두 분께서 남으로 내려가 이승만대통령이나 미국측의 신임장을 받아 오라. 그래야만 정식회담이 될 것이고 구체적인 협의가 수 있지 않느냐> 그러면서 이는<두 분이 남으로 가도록 안전지대까지 안내하겠으니 준비를 하라>고 했다.
3월초 이승엽으로부터 기별이 왔다. <굳이 위험한 전선돌파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3월 중순에 후퇴한다. 서울에 남아 있다가 정부가 들어오거든 교섭해 보라. 그리고 일이 잘되면 개성으로 오라. 그곳에서 당에 들러 이승엽을 만나러왔다고 하면 나와 연락이 될 것이다.>
3월15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다. 그러나 일선행정기관만 서울에 왔을 뿐 정부는 피란수도 부산에 머물러 있었다. 4월초 그들은 부산을 향해 남행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각지에 들러 유력자들에게 종전운동을 협의하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해 주도록 의뢰했다. 그러나 북진론에 눌려 정부쪽에는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그럴 때 만난 것이 미군정 때 「하지」사령관의 보좌관으로 민주의원과의 연락을 담당했던 이용겸씨다.
이용겸씨는 전쟁종식을 위한 운동이라면 미국측과 접촉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면서 그쪽으로 연락했다.
그들도 미측과 접촉하기 위해 서울로 되돌아 왔다. 이리하여 미측과의 연락이 닿았을 때는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막 시작된 해였다.
며칠 후 몇 사람의 미국인이 그들을 찾아와 이승엽과의 면담내용을 상세히 청취하고 메모해 갔다. 아마도 북의 의도를 판단하는 참고자료로만 활용한 듯 했다.
그런데 얼마 뒤 정전회담이 중단됐다. 그럴 때 예의 미국인들이 다시 두 사람을 찾아왔다. <두 사람중 한 분이 북쪽에 다녀올 수 없겠는가. 전선돌파는 우리가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 측의 희망사항은 북의 고위층을 만나 종전의사를 타진하고 진정으로 전쟁종식을 원한다면 정전회담 중단책임을 떠다밀지 말고 조속히 회담을 재개하도록 하자는 것. 단 비공식 막후교섭을 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분을 보장하는 증명서 한 장 뿐 신임장 같은 건 없는 민간인 자격의 북행이었다. 종전운동 참여자들은 이 제안을 놓고 망설였다. 이미 정전회담이 시작된 이상 그들의 역할은 끝난 듯 했고 또 그들에 대한 정부의 조치도 우려했다. 그랬지만 미측의 간곡한 당부로 북행을 결정했다.
51년7월28일 박진목씨는 미군대령의 안내로 전선을 돌파, 개성으로 떠났다. 「10일만에 이승엽과의 면담을 끝내고 돌아오라」는 것이 미국인측과의 약속이었다. 그는 무사히 개성에 도착, 북괴측 정전회담부대표직을 맡고있던 이상조와 연결됐다. 이상조는 평양과의 연락 후 길 안내자까지 주선해 주었다. 순조로운 북행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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