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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칸(武道館)의 한류 스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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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8월 22일 박용하, 9월 2~3일 비, 11월 22~23일 류시원.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류스타들의 공연 일정이다. 장소는 모두 도쿄(東京)의 부도칸(武道館). 짤막한 연예 단신으로 봐 넘길 수도 있으나 곰곰이 따져 보면 꽤 의미 있는 뉴스다. 한국인이 조용필 이후 22년 만에 부도칸 스테이지에 선다고 해서가 아니다. 부도칸이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적 상징성 때문이다.

부도칸은 도대체 어떤 곳인가. 국내에선 일본 최대의 공연장, 일본의 카네기홀, 콘서트의 전당 등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도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원래 부도칸은 공연장이 아니다. 이름 그대로 무도관이다. 전통 무도의 진흥, 청소년의 심신 육성, 국기(國技) 확립 등이 설립 취지다.

설립을 주도했던 사람은 대부분 당대의 보수 정치인이다. 대표자가 요미우리(讀賣)신문 사주이자 국회의원이던 쇼리키 마쓰타로(正力松太郞)였다. 그는 1962년 중의원에 부도칸 건립 결의안을 제출했다. 공사비는 국가 보조금과 재계 기부금 등으로 충당했다. 이듬해 부도칸이 완공되자 쇼리키는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신문업에 뛰어들기 전 경찰 관료를 지냈던 그에게 딱 알맞은 자리였다.

그의 제안대로 부도칸은 64년 도쿄 올림픽의 유도 경기장으로 사용됐다. 그 뒤 각종 무도 대회, 휘호 대회, 클래식 음악회의 전당이 됐다. 또 8월 15일엔 매년 정부 주최의 전몰자 추도식장이 돼 왔다. 일본의 침략 전쟁인 태평양전쟁에서 사망한 310만여 명의 일본인을 추도하는 의식이다. 올해도 부도칸에선 일왕과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이 치러졌다.

부도칸은 위치부터 범상찮다. 부도칸의 한쪽은 야스쿠니(靖國) 신사로, 반대편왕은 기타노마루(北の丸) 공원을 통해 황궁으로 연결된다. 태평양전쟁 땐 전선에 나가는 장교들의 집회소가 있었다.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말하는 국가 수호의 지령(地靈)이 충만했던 곳이다.

그러나 부도칸엔 이와는 정반대의 문화 코드가 있다. 66년 비틀스의 공연을 계기로 부도칸은 록 콘서트에 문호를 개방했다. 물론 비틀스의 공연이 순조롭게 이뤄졌던 건 아니다. 당시 비틀스는 수용 인원 1만 명의 공연장을 요구했는데 이에 맞는 장소가 부도칸밖에 없었다. 부도칸이 비틀스의 공연장으로 발표되자 보수 여론이 들끓었다.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총리까지 나서 "비틀스는 부도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쇼리키 회장은 비틀스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는지 "베틀스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에게 부도칸을 내줄 순 없다"고 역정을 냈다. 비틀스를 초청한 게 자신의 요미우리신문이었지만 부도칸만큼은 쓰게 할 수 없다고 버텼다.

우여곡절 끝에 부도칸이 공연장으로 확정되자 이번엔 우익 테러설이 나돌았다. 공연 몇 주일 전부터 우익단체의 선전 차량이 몰려와 비틀스의 공연을 비난했다. 협박장도 날아들어 경찰이 삼엄한 경계를 펴기도 했다. 부도칸이 지닌 사회적 구심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비틀스가 한번 길을 트자 문이 활짝 열렸다. 세계적 록 스타들의 공연이 줄을 이었다. 레드 제펄린, 이글스, 밥 딜런, 듀란듀란…. 특히 78년 밥 딜런이 부도칸 공연을 담은 라이브앨범 'At Budokan'을 내놓자 미국 가수들에게 부도칸은 명예의 전당처럼 여겨졌다.

지금 부도칸은 때에 따라 무도관이 되기도, 공연장이 되기도 한다. 전통과 개방, 문화적 구심력과 원심력이라는 정반대의 코드가 공존하는 보기 드문 곳이다. 한류스타들의 잇따른 부도칸 공연은 후자의 한 단면이다. 이는 곧 일본 문화의 원심력을 촉진하는 역량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뜻이 된다.

안 그런 것 같지만 일본은 다양한 사회다. 일부의 혐한(嫌韓) 분위기조차 그런 다양성의 하나로 이해해 달라는 일본 지식인도 있다. 그렇다면 한류스타들의 부도칸 공연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또 다른 일본의 다양성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부도칸표 한류스타'가 계속 이어지기 기대한다.

남윤호 미디어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