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즐겨읽기]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 불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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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불륜과 남미’에는 이처럼 투박한 선으로 남미의 강렬한 분위기를 묘사한 일러스트들이 실려있다. 하라 마스미의 작품이다.

불륜과 남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민음사, 212쪽, 1만원

여행은 일종의 쉼표다. 살던 곳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평소와 좀 다른 일상을 보내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기에 딱 좋은 기회다. 작가가 보름남짓 아르헨티나를 여행한 뒤 1년여에 걸쳐 차례로 써낸 7편의 단편을 묶은 이 책도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남미를 방문한 일본인 주인공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소박한 성당을, 멘도사의 유유자적한 거리를, 이과수 폭포의 비경을 무대로 저마다의 1인칭 시점에서 '쉼표'를 찍는다.

일본의 대표적인 신세대 소설가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 작품 주인공들(대부분이 여자들이다) 중 누구는 현재진행형의 불륜관계를 맺고 있고, 또 다른 누구는 부모나 배우자의 불륜으로 고통을 받았던 과거나 현재가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불륜을 인생의 '마침표'로 보기는커녕 '느낌표'라는 식의 호들갑도 떨지 않는다. 죽음이 삶의 일부이듯, 불륜 역시 여느 연애나 결혼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흐름이라는 담담한 태도다. 첫 단편 '전화'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하면, "현대인은 많은 사람을 만나니까 연애를 하지 않기가 오히려 더 어렵"고, "연애나 결혼이나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단편 중에는 꼭 집어 '불륜'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관계들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주인공들의 태도는 다르지 않다. 나이가 갑절쯤 되는 남자와 관계를 맺거나, 이혼이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행파트너와 새로운 사랑에 빠진 인물들도 저마다의 상처에 대해서는 담담하기 짝이 없다. 다만 인생이든 여행이든 연애든 "아무런 맥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꿀처럼 달콤하고 풍요로운 순간"(단편'마지막 날'중에서)을 놓치지 않으려 할 따름이다.

이처럼 남미라는 새로운 배경에서도 작가가 데뷔 이래 줄곧 보여준 세계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잠깐의 관광이나 출장을 왔을뿐인 주인공들처럼 작가도 남미의 역사나 현실에 대해서는 아는 체 하지 않는다. 유일한 예외가 단편 '하치 하니'인데, 주인공은 군사독재 시절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행진을 구경하면서 느낀 감상을 일본에 두고 온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연결한다.

다 읽고 나서 불후의 고전이 될 근대소설의 이른바 명작을 만났다는 포만감을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전체적으로 어느 외로운 시간에 독자가 고독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일을 막아주는 데는 썩 요긴하다. 장편으로 출발한 작가가 이제는 단편에서도 적절한 여운과 위로를 주는 솜씨가 매끈해 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여행을 소설화하는 기획솜씨 자체가 더 매끈하게 보인다. 소설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남미의 강렬한 인상은 전문가들의 사진과 일러스트를 곁들여 보완했고, 책 말미에는 작가의 여행일정을 식당의 주요메뉴까지 꼼꼼하게 실어놓았다. 일본에서는 2000년 단행본으로 나왔는데, 작가는 2년 뒤 다시 타히티 여행을 모티브로 한 연작을 펴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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