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 기자의 문학 터치] 나이 마흔, 댄디도 늙는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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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지음

사내 나이 마흔이다. 가족도 꾸렸고 직장도 번듯하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슬쩍 불륜을 꿈꾸기도 했다. 평온하지만 지리멸렬하다. 갑갑하지만 뛰쳐나갈 수는 없다. 무릎피고 일어날 기운이 없고 막상 달려갈 곳도 마땅찮다.

장석남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문학과지성사)를 읽었다. 시집에서 남은 단어라면 '마흔 살'이다. 참여문학의 기세가 드높던 1980년대 후반, 홀로 대오에서 비껴섰던 그가 오늘은 세월의 무게를 버거워한다. 그 복잡한 심사가 시집에 그득하다. 심란한 심사 따라가 보니 그의 일상이 대강 그려졌다. 하여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몇 편의 시를 인용하고 부분 생략해 여기에 옮긴다. 따라 읽으면 마흔 살 시인 장석남의 하루가 짐작되리라. '마흔이 된 울음'을 짓는 그의 하루는 '딴청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요즘은 무슨 출판 모임 같은 델 가도 엄숙하다/떠드는 사람 하나 없고 콧노래 하나가 없다/밤 지새는, 뭐 그렇게라도 치열해보자는 이 없다/어색스런 웃음을 웃다간 또/웃음 속으로 사라진다/나는 그 웃음 속에/몇 겹의 웃음을 섞고/자리를 뜬다'

'우아하게 굴복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목숨은 그래도 끝까지 부지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한다 나를 단속하고 간혹은 딴청을 부려야 한다는 기교까지 생각한다'

'책을 내기로 하고 300만 원을 받았다/마누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내 정신의 어여쁜 빤스 같은 이 300만 원을,/나의 좁은 문장으로는 근사히 비유하기도 힘든/이 목돈을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허물어 술을 먹기에도 이미 혈기가 모자라/방문객 앞에 엉겹결에 말아쥔 애인의 빤쓰 같은/이 목돈은 날마다 땀에 절어간다'

'이제 잠자리에 들어서도 반성이랄 것도 없이 그냥 배가 부르면 배가 부른 채로 부른 배가 부른 잠을 그대로 받아 안는다./속물은 할 수 없다. 잠 속에도 이것저것을 묻어둔 모양이다. 어떤 때는 여자가 보이고 어떤 때는 돈다발이 보이기도 한다.'

'내 시를 보고/너무 이른 나이에 둥그렇게 되었다는 말도 옳아서/밤새도록 이 꺾인 고궁의 돌담 아래 앉아 있어보는 것이다'

모임에 나가선 어색하게 웃다가, 굴복하며 사는 기교를 생각하고, 아내 몰래 목돈 쓸 궁리를 한다. 이젠 잠도 너무 잘 들어, 하루는 밤새도록 고궁 돌담 아래서 시를 생각한다. '시인은 시를 근심할 뿐'이라고 생각해본다.

시집을 덮고 "장석남도 늙었구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더니 옆의 선배가 "그 친구 댄디(Dandy) 아냐?" 되물어온다. "댄디였는데, 아니 댄디인데, 늙었네요. 댄디도 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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