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 나」와 「도 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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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고향으로나 내려가야겠읍니다. 거기에서 농사나 짓고 시공부나 할까합니다』 -
이렇게 끝을 맺고있는 당신의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한번 조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읍니다. 물론 잘 압니다.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는 국어시험을 치르고 있는 수험생의 답안지도, 학점을 얻기위해 써낸 대학생의 리포트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남의 편지를 읽고 문법강의를 하려드느냐고 화를 낼 것입니다.
『찢어진 기발처럼 도시에서 오늘을 살아갈 것인가? 태어났던 땅으로 돌아가 내일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인가?』 알고싶은 것은 이 절실한 선택이지 조사의 용법같은게 아니라고, 답답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화를 내고 답답해 하기 전에 오랫동안 우리나라 말과 그리고 우리의 정신을 지배해온 그 조사의 연명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냥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쓰지않고 거기에 「나」 라는 조사를 붙여 「고향으로나…」라고 말했읍니까? 어째서 농사를 짓고 시공부를 한다고 하지않고 「농사나…」 「시공부나…」 할까 한다고 표현했읍니까? 당신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의식중에 말끝마다 「나」의 꼬리를 붙여 말하는 습관이 있읍니다. 그래서 언젠가 나는 「나나의 비극」이라는 칼럼을 쓴 적도 있읍니다. 「에밀·졸라」의 소설「나나』 이야기가 아닙니다. 차나 마시자고 하는 사람들. 밥이나 먹자고 하는 사람들. 잠이나 자자고 하는 사람들. 자기가 선택하고 행위하고 있는 것에 「나·나」의 조사를 붙여 생활해 가고 있는 그 의식의 비극말입니다. 「나」 라는 조사가 붙으면 그 명사나 동사가 갑자기 그 생생한 빛을 잃게 됩니다. 『차나 한잔 마시자』라고 하면 그 차에서는 따스한 열기와 향기가 사라집니다. 「마시자」라는 동사에서는 꿈틀대는 욕망이 서리를 맞은 시월의 초목처럼 시들어져 버립니다.
하찮은 물건, 소극적인 행동에나 붙어 다니는 조사이기 때문입니다. 「나·나」의 조사는 회색의 물감입니다.
어째서 우리의 고향에 「나」자가 붙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 저것. 다 실패하고 난 뒤에, 이제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될 때면 사람들은 으례 긴 한숨과 함께 「고향으로나」가자고 말하지요.
고향은 다 타버린 담뱃재나 그 꽁초를 버리는 재떨이가 아닙니다. 비단옷이 아니라 「나·나」를 걸치고 돌아가는 귀향은 절대로 성공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천하지대본의 문자가 퇴색했기로 농사짓는 일에 「나」자를 붙여야 되는 것입니까? 지금은 시의 시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압니다.
광고의 문자들이 시를 추방하고 정치의 슬로건이 시를 시녀처럼 부리고 있는 세상이지만 어째서 인간의 혼을 생각하고 창조하는 그 시에 「나」자를 붙여 불러야 합니까? 고향…농부…시인…아무리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지켜가려고 해도 현대문명속에서 허물어져가는 것들. 그것을 「나」의 그 소극적인 조사로 어떻게 감당하려고 합니까? 나는 『소나 말의 새끼는 시골로 보내야 하고 사람의 자식은 서울로 보내야한다』는 백사 이항복도 아니며 백미오두에 허리가 꺾여지는 서울생활을 뿌리치고 귀거래사를 부르던 도연명의 산림파도 아닙니다.
당신이 시장속에서 돈을 벌든, 전원의 자연속에서 국화를 따고 시를 적든 상관하지않습니다만 그런것들 보다는 조사의 선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을 하든간에 「나」의 조사를「도」의 조사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차나 마시자」라고 할것이 아니라 「차도 마시자」라고 그 조사 하나만 바꿔보아도 회색의 삶속에 빛이 쏟아져 들어 올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돌아온 남편을 「술이나 마시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주부는 결코 행복해질수 없읍니다. 그 여인은 틀림없이 「결혼이나 하자」고 말하면서 결혼식을 올린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도」로 바꿔 「술도 마시고 왔다」고 생각하면 도배지를 다시 바르지 않아도 어둡던 그 방안은 환해질 것입니다. 「나·나」를 「도·도」로 바꾸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도시이든 고향이든 텅비었던 가슴에 불이 타오르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관절의 마디마디가 펴치는 강렬한 동사가 생겨날 것입니다. 모든 명사들은, 새싹의 푸른빛을 회복해갈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고향으로도 돌아갈수가 있고 농사도 지을수 있으며 참다운 시한귀절도 쓸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사의 운명을 바꾸십시오. 차도 마시고 잠도 자고 음악도 들으십시오. 「나·나」의 따분함은 사라지고 「도·도」의 푸성귀같은 생이 시작될것입니다. 그래서 「지멜」의 말마따나, 『장미의 꽃나무에 가시가 돋쳤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시나무에 장미꽃이 피었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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