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후폭풍] '검찰 떡값 의혹' 실명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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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일 법사위에서 노회찬 의원이 ‘검찰 떡값 의혹’을 추궁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가 또 한번 지진을 일으켰다. 이번 진원지는 언론사가 아니라 국회였다. 18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담은 불법 도청 녹취록 일부를 공개했다. 노 의원은 "해당 인사들은 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것으로 언급된 인물들"이라고 주장했다. 녹취록에 이름이 거론된 당사자들은 "사실무근"이라며 펄쩍 뛰었다. 일부는 노 의원에 대해 법적 대응을 벼르고 있다. 불법 도청 테이프의 내용 공개를 둘러싼 알 권리와 통신비밀보호법의 충돌에 이어 이제 논란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으로까지 번지게 됐다.

◆ 노회찬 녹취록 공개 과정과 내용=노 의원이 공개한 녹취록은 1997년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과 이학수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장 간의 대화록으로 명절 때 7명의 검찰 인사들에게 500만~3000만원을 건네는 방안을 논의하는 대목이다. 노 의원은 "삼성그룹이 지속적으로 검찰을 관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에 검찰 대신 특별검사가 이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그러면서 "현직 검찰 간부 2명은 알선수뢰죄와 뇌물죄 혐의가 짙다"며 "법무부는 자체 감찰을 실시해 관련자들을 즉각 파면하고, 국회는 법사위 차원의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의원은 이에 앞서 같은 내용의 자료를 이날 오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리고,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 불법 테이프 내용 공개 논란 재점화=노 의원의 녹취록 내용 공개는 불법 도청으로 얻은 정보의 공개를 금지한 통신비밀보호법을 정면으로 위반해 논란이 일고 있다. 테이프 내용을 처음 보도한 문화방송도 검찰간부에 대한 떡값 논의 내용은 보도했지만, 거론된 당사자들을 실명으로 다루진 않았다. 노 의원은 그러나 "면책특권(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에 관해 국회 외에서 책임지지 않도록 한 헌법조항)이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진실 규명을 위해 대화록을 공개했다"며 "나를 기소하려면 하라"고 말했다. 그의 녹취록 공개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민노당은 테이프의 내용 공개를 당 차원에서 주장해 왔다. 현재 정치권은 검찰이 확보한 274개 테이프의 공개 여부를 놓고 대립해 있는 상태다. 이 때문에 노 의원의 녹취록 공개 행위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나머지 테이프의 운명과도 직결돼 있다. 정치권이 어떤 경로를 통해 테이프를 입수했을 경우 이번 같은 상황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면책특권의 한계나 남용 논란도 또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허영 명지대 법학과 석좌교수는 저서'한국헌법론'에서 "국회 내 발언이라 해도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은 직무상 행위로 볼 수 없으므로 면책특권 대상이 아니다"라고 했다.

◆ "현행법으론 테이프 공개 못해"=천정배 법무부 장관은 국회 법사위에 나와 "현행법 체계에서는 검찰에 274개 테이프를 공개하라고 할 수 없다"며 "(테이프를 공개하려면) 특별 입법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천 장관은 테이프 내용에 대한 수사 여부를 묻는 의원들 질문에 대해 "테이프 내용을 보고받지 않았고, 대통령께 보고하지도 않았다"고 설명한 뒤 "잠정적으로 내부 계획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불법적으로 수집된 증거라도 수사 개시의 단서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며 "이미 언론에 공개된 첫 번째 테이프는 수사(결정 여부)가 임박했다고 할 수 있고 나머지 274개는 국회의 논의 과정을 지켜본 뒤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천 장관은 현 정부의 불법 도청 수사 여부를 묻는 질문 등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검찰 수사에 아무런 성역이 없다"고 강조했다. 테이프 내용을 보도한 문화방송 이상호 기자의 처리 여부에 대해선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조사가 불가피했다"며 "그러나 테이프를 입수하게 된 동기, 명예훼손에서의 진실, 공공이익에 부합되는 의도로 공개했느냐 여부 등을 고려해 적절히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김정욱.강주안 기자 <jwkim@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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