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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고부갈등에 새우등 터진 결혼 15년차 남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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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두 여자가 앙숙인 이유

Q (스트레스로 안면마비 온 남편) 결혼 15년차 두 딸의 아빠입니다. 예쁜 아이들, 헌신적인 아내, 게다가 장모 사랑까지 넘쳐 다들 부러워합니다. 결혼 전 처갓집에 처음 인사 갔을 때부터 장모님은 저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셨죠.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저에겐 문제가 딱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고부갈등입니다. 사실 아내와 어머니는 한동안 모녀처럼 아주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점점 충돌이 잦아지더니 이젠 아주 사이가 틀어져 버렸습니다. 며칠 전에도 아내는 속사포 문자로 시어머니한테 속상한 일을 끝도 없이 보내더군요. 사이좋았던 아내와 어머니는 대체 왜 앙숙이 된 걸까요. 한국에선 고부갈등을 피할 수 없는 건가요.

A (장모 사랑 듬뿍 받는 윤 교수) 최근의 연구를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미시간대학 사회연구소 테리 오벅 박사는 미국국립보건원 연구비로 고부관계와 장서관계에 관한 시간 추적 연구를 했습니다. 우선 결혼한 지 1년이 채 안 된 신혼 부부 373쌍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남편에게는 장인장모, 아내에게는 시부모와 얼마나 가까운지를 묻고 그 정도를 정량화했습니다. 그리고 16년을 기다린 후 부부관계를 평가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신혼 시절 장인장모와 가깝다고 얘기한 남편들은 이후 16년 동안 이혼 위험율이 다른 남편들에 비해 20% 낮았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가깝다고 한 아내는 같은 기간 이혼 위험도가 오히려 20% 더 높았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가까우면 시간이 지날수록 간섭하는 사이가 되고 이게 갈등으로 이어져 부부 사이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결과가 나타난 것은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있습니다. 여성은 엄마나 아내라는 정체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성에게 아빠나 남편이라는 정체성은 부수적인 정체성일 뿐이라는 거죠. 남성은 사회에서의 지위를 더 중요한 정체성으로 여기니까요. 예컨대 미역을 볶지 않고 끓이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가 미리 볶아야 고소하고 맛있다고 얘기하면, 대부분의 며느리는 이걸 정보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본인의 독립적 정체성을 침범하는 공격으로 느낍니다. 서울시가 한 여성포털과 며느리 3235명을 대상으로 시어머니 스트레스를 물었더니 1위가 살림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잔소리(28%)였습니다. 4위는 자녀출산과 육아에 대한 간섭(16%)이었고요.

 요즘 요리를 즐기는 남성이 꽤 있죠. 만약 장모가 미역국 끓이는 방법을 말해 주면 정체성을 공격 받는다고 여기기는커녕 좋은 정보 줬다고 감사하게 생각할 겁니다.

 하여간 결혼 초 아내와 시어머니가 친한 게 오히려 결혼 생활의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니 고부관계는 확실히 간단한 일차 방정식은 아니네요.

02 무조건 앞에 있는 사람 편들어라

Q이유가 무엇이든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을 해결해야 할 것 같은데 쉽지 않습니다. 아내한테 살 날 얼마 안 남은 어머니가 나이 들어 노여움이 많아진 것이니 좀 참자고 하면 버럭 화부터 냅니다. 왜 맨날 본인한테만 참으라고 하느냐면서요. 어머니에게도 아내가 잘하려고 노력하니 칭찬 좀 해달라고 하면 역정부터 냅니다. 기껏 아들 키워놨더니 아내 편만 든다면서요. 중간에서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한동안 얼굴 신경 마비로 고생했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A아내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죠. 한 결혼정보회사가 여성 300명에게 고부갈등을 겪을 때 원하는 남편의 모습에 대해 물었더니 ‘내 편 들어주는 남편’이 1등(71%)이었습니다. 중립을 지키는 남편은 고작 27%였습니다.

 답은 명확합니다. 중재자가 아닌 그 여자의 편에 서야 합니다. 고부관계는 한 남자를 둔 두 여인의 갈등이기도 하고, 엄마와 아내라는 정체성을 건 자존심 싸움이기고 합니다. 남자가 아무리 중재를 하려고 해도 잘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갈등을 증폭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박쥐처럼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라는 말이냐고 묻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중재하는 것보다 아내와 이야기 할 때는 아내 편을,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는 어머니 편을 들어야 합니다. 박쥐 노릇 하는 게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어차피 중재하는 것도 힘든데 기왕 힘들 거라면 좀 더 효과적인 방법에 더 애를 쓰는 게 좋지 않을까요.

03 한국도 장서갈등 점점 늘어나

Q어렵네요. 왜 한국에서 태어나서 이 고생을 하는가 싶을 정도로요. 미국에서는 고부갈등 대신 장모와 사위의 갈등, 즉 장서갈등은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왜 서양엔 장서갈등이 심하고 한국에선 고부갈등이 심한 걸까요. 남녀 차이라면 동서양이 다 똑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A서양에도 고부갈등이 있습니다. 고부갈등의 깊은 무의식엔 엄마와 아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강력한 감정적 연결이 있습니다. 프로이드가 심리 발달 단계에서 언급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남자아이가 엄마를 여성으로 사랑하는 상징을 담고 있죠. 모자 관계의 긴밀함은 서양에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장서갈등 역시 서양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장서갈등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한국 남성의 전화에 걸려오는 상담 내용의 10%가 장서갈등이라고 하네요. 장서갈등이 이혼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늘고 있고요.

 그래도 고부갈등은 확실히 한국에서 더 심하죠. 고부갈등이 심한 사회는 여성이 자신의 이름 석자 보다 가정이라는 집단 안에서의 엄마나 아내로서의 정체성이 더 중요한 사회, 그리고 남아 선호가 강한 사회입니다. 한국만이 아니라요.

 최근 한국에서 장서갈등이 느는 것은 여성의 파워가 커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들뿐 아니라 딸도 중요하고, 가정 내에서 엄마의 역할 역시 조용한 서포터를 넘어 파워를 갖게 된 거죠. 양성 평등 사회로 가는 길에서 오는 변화겠죠.

 결국 고부갈등이나 장서갈등은 동서양의 특징이라기보다 개인주의가 보편화한 사회인가, 아니면 집단주의가 더 중요시되는 사회인가가 더 영향을 끼칩니다. 솔직히 전 너무 심하지 않은 귀여운 고부갈등이 계속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부갈등엔 집단주의에 근거한 가족애가 담겨 있으니까요. 집단주의는 나 자신보다 내가 속한 그룹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인데요. 고부갈등이 완전히 없어지려면 결혼한 아들은 정서적으로 남이 돼야 합니다. 완전히 독립한 하나의 개인으로 보는 거죠. 넌 너, 난 나인 개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되니 고부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세상일이 다 그렇지만 극단은 좋지 않죠. 따뜻한 가정이라는 그룹 안에서 개인의 개성을 인정해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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